날인 누락만으로 3개월 업무정지? 과도한 처분, 법원이 제동 걸다
공인중개사법은 부동산 거래의 안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강력한 규제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중 하나가 ‘거래계약서 서명·날인’ 의무이며, 이를 위반할 경우 업무정지 처분이라는 행정제재가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법원이 공인중개사의 단순한 실수에 대해 과도한 제재라고 판단하며 제동을 걸었다. 서울행정법원 2024구단80784 사건은 제재 행정의 적정성 및 재량권의 한계를 되짚는 중요한 선례로 평가된다.
날인은 누락됐지만, 실질적 중개는 완료됐다
사건의 발단은 2023년 12월 30일 임대차계약 체결 당시 원고 공인중개사가 계약서 세 부 중 한 부에 날인을 누락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고는 공인중개사란에 자신의 성명을 자필로 기재하고 도장을 찍지 않은 상태로 계약서를 임차인에게 교부했다. 다만 해당 계약서의 모든 면에는 임대인·임차인·공인중개사 명의의 도장이 간인된 상태였다. 그 외 계약서 2부에는 서명과 날인이 모두 완료된 상태였으며, 각 당사자에게 한 부씩 전달되었다.
이후 임차인은 전세대출이 불가하다는 사유로 계약을 해제하였고, 이에 임대인은 계약금을 반환하였다. 이 과정에서 계약은 무효로 되돌려졌지만, 계약서가 작성되고 계약금 일부가 오고 간 이상, 중개행위는 실질적으로 완료된 상태였다.
서울 영등포구청은 계약서 날인 누락을 문제삼아 공인중개사법 제26조 제2항, 제39조 제1항 제9호에 따라 3개월의 업무정지처분을 내렸다. 이에 원고는 “해제된 계약에 대해 중개가 완성되지 않았고, 설령 완성되었더라도 날인 누락이 경미한 사안인데 업무정지 3개월은 과도하다”고 주장하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날인 누락은 사소한 절차상 하자, 직접성과 공식성 훼손 아냐
재판부는 먼저 공인중개사법상 ‘중개의 완성’ 개념에 대해 명확히 정리하였다. 즉, 중개는 당사자 간의 거래를 알선하는 것으로, 계약의 체결 자체가 아닌 “계약의 주요 내용이 확정되어 계약서가 작성되는 시점”에 완성되는 것이다. 계약이 해제되었다는 사정은 중개완성을 부정할 수 없으며, 중개보수 청구권의 존재 또한 이를 방증한다.
이어 법원은 쟁점이 된 날인 누락의 실질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원고가 교부한 계약서에는 날인이 없었지만, 간인은 모두 찍혀 있었고, 계약 체결 전후의 경위나 당사자들의 인식에 비추어 볼 때, 중개사의 직접적인 관여와 공식적인 중개행위는 명백하였다. 따라서 공인중개사의 날인 누락이 ‘공정한 중개행위 담보’라는 입법 취지를 실질적으로 훼손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처분은 합법이나, 재량권은 남용되었다
공인중개사법 시행규칙은 날인 누락 시 업무정지 3개월 처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위반 정도나 동기, 결과 등을 참작하여 업무정지기간을 1/2 범위에서 감경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원고가 단 1부의 날인을 누락한 점, 그 계약서에도 간인이 되어 있는 점, 계약 당사자 간 어떠한 분쟁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나아가 원고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업무정지 3개월이 과도한 제재라는 점 등을 들어, 이 사건 처분이 비례의 원칙에 반하여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으로 보았다.
행정기본법 제22조는 행정청이 제재처분을 할 때 위반행위의 동기, 방법, 귀책사유, 시정 노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본 사건은 이러한 기준이 지켜지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실체보다 형식만 중시한 행정처분, 법원은 현실을 봤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날인 누락이라는 형식적 하자만으로 중개사에게 과도한 불이익을 가할 수는 없다는 명확한 경고를 담고 있다. 공정한 중개를 위하여 형식적 요건은 중요하나, 실질적 중개행위의 완결성과 거래 당사자들의 피해 유무, 중개사의 귀책 정도 등 종합적인 고려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행정처분은 단순한 규정 적용을 넘어서 ‘합목적성’과 ‘비례성’을 갖추어야 한다. 특히 중개업처럼 생계와 직결된 직종에서는 처분의 수위가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하며, 규범의 목적이 단속이 아니라 ‘정의로운 질서 확립’이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서울행정법원의 이번 판결은 형식과 실질 사이에서 행정의 적정한 경계를 제시한 판례로서, 향후 유사 사례에 있어 행정청과 실무자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