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화해하려면 화를 내라

251215 적반하장

by 밀크씨슬

상대가 화가 났는데 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난 사과도 하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봤는데 통하질 않는다.

이럴 때 화해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분이 저절로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침착한 상태가 되었을 때 다정하게 사과하는 게 일감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 방법이 안 먹힐 때가 있다.

모종의 이유로 상대가 나랑 절연을 각오하고 단단히 삐져버린 경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화를 내야 한다.


이게 왠 미친 소리지?



왜 기분을 풀지 않는지에 대해 화를 내는 건 안된다.

그건 그냥 떼쓰는 거다.

화를 내려면 평소에 담아놨던 크고 작은 불만을 억지로라도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나한텐 별일이 아니었지만 상대한테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를(남모를 죄책감) 부분들을 면밀히 선별한다.

그리고 잘 선별된 불만을 아주아주 크게 포장한다. 머릿속으로 그 상대가 되어보면 좋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쓴다. 내가 불만을 가지게 된 사연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불만을 가지고 가서 매쏘드 연기를 펼칠 차례이다.

단 둘이 있는 시간을 노려라. 사과하는 척 다가가라.

주의할 점은 내가 만든 불만은 어디까지나 거짓이라는 걸 잊고 매쏘드연기를 펼쳐야 한다.

동시에 불만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진짜 감정을 섞어 찐으로 화를 내선 안된다.


매쏘드연기를 잘 펼치면 상대는 맞서서 화를 내기보다는 의외로 황당한 표정이 된다.

이런 경우는 평생 처음이기 때문이다. 보통 어처구니없어하며 더 토라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일주일 방치해라. 이건 더 이상 당신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그리고 충분히 방치했다는 느낌이 들면, 어느 순간 말없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 된다.

이를테면 그가 좋아하는 커피 한잔 정도를 남몰래 자리에 올려놓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커피가 쓰레기통을 처박지 않았다면 화해할 여지가 있는 거라 봐도 좋다.

이제 따로 밥 먹자고 하든 몰래 불러내든 미행을 하든 1:1로 만나서 쿨하게 미안했다고 하면 된다.

그럼 의외로 잘 먹히는 경우가 많다.

아니라면? 어차피 잃은 사람 확실히 보내는 거다. 어차피 난 잃을 게 없으니까.


이 방법이 먹히는 원리는 간단하다.

어지간한 모욕은 감정이 정돈된 상태에서 정중한 사과를 받으면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지간하지 못한 모욕은 그 모욕이 실제로 큰 피해를 줘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이다.

바로 그 사람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당신이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기가 싫다. 그래서 나를 돌멩이로 만들어버린다.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면 무릎이 깨질지언정 마음이 아프진 않다. 이만큼이나 마음이란 게 중요하다. 삶이란 원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디펜스 게임이다.


그러니 이 상태에서는 상대가 화해를 청해도 받아줄 리 없다. 난 그에게 돌멩이 한 조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대가 스스로 지키려고 시전 한 마음 지키기 마법이 나를 돌멩이로 만들어버렸다.

상대의 마법으로 돌이 되고 말았다면 일단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리고 기분에서 나온 마법은 기분에서 나온 마법으로 풀린다.

상대의 기분을 건드려버려라. 그럼 상대는 마법을 한번 더 걸 것이다.

이제 무시당하던 돌멩이에서 상종도 못할 악마로 강등이 되었다. 더 최악이 된 거 아니냐고?


아니다. 돌멩이랑은 화해할 수 없지만 악마랑은 화해할 수 있다.

그리고 천사가 건네준 친절은 당연하지만 악마가 건네준 친절은 의심스럽다.

의심스럽다는 건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의심이 해소되는 순간이 악마가 사면받는 순간이다.

의심은 커피고 해소는 진심 어린 사과다. 식사 정도 대접하면 더 좋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렇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로 하면 꽤나 괜찮은 전략인 거다.



작가의 이전글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