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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Apr 26. 2022

4월 25일의 꽃, 중국패모

'위엄'이라는 꽃말

 이름도 생소한 오늘의 꽃은 '중국패모'입니다. 이 꽃의 존재를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365 꽃말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일부의 꽃들이나마 알게 되어감이 사뭇 뜻깊습니다. 존재함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어찌 보면 한 끗 차이지만 유와 무의 경계를 넘나듦임을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존재하는 것, 그것은 모른다고 말하지만 사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제 세계에는 없던 꽃, '중국패모'의 꽃말에 대해 오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 근접하여 촬영한 중국패모입니다. 환 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꽃 이름에 '중국'이 붙은 이유는 중국이 자생지인 패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패모도 존재하는데 실제로 우리가 볼 수는 없습니다. 함경도 지방에서 서식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 자색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우리 패모입니다. >

 중국은 역사적으로 항상 자신들이 중심에 있길 원했습니다. '중화사상'이라고 하지요. 자신들의 왕을 '황제'라고 칭하며 가장 높은 곳에 오르고자 했습니다. 긴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이름의 중국은 영토를 넓히고 특히 우리나라와는 군신 관계를 맺고자 하여 그들의 '위엄'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당시 중국의 문화와 기술이 우위에 있기도 했습니다. 선진 문물과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유행처럼 행하곤 했으니까요. 중국의 문화적 속국임을 스스로 인정하며 어마머마한 조공을 바치고 조선의 백성들을 그들의 전쟁에 징용시키기에 서슴이 없었습니다. 중국민들의 민족성이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위엄'있고자 하기에 긴 역사 속에서도, 그리고 현재에도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위엄'이라는 것은 타인에 의해 존경받고 스스로 겸손하며 점잖고 엄숙할 때 얻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오만하고 스스로 자만하면 절대 '위엄'있다 말할 수 없어요. '위엄'이라는 가치 및 미덕도 단단한 나 자신이 타인의 존경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생각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에게는 '위엄'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은 '이국종 교수'입니다. 의사로서 주어진 사명감과 책임만을 다하기 위해 오롯이 살아냈던 이국종 교수에게는 위엄이 느껴집니다. 오만방자하지 않고 겸허하며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오로지 사람을 더 살리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내어 왔습니다. 아프고 병든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던 칼잡이는 온전히 칼잡이로서의 삶만을 삽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싶은 전형적인 의사의 모습을 한, 처음 의대에 들어가면 한다고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내용처럼 살고자 한 그분을 많은 사람들은 존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엄숙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비로소 '위엄'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이국종 교수만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진정한 '위엄'이 느껴지는 사람이 정말 많지요. 요지는 그 '위엄'이 스스로의 권세를 떨치며 표출하는 가짜 '위엄'이 아닌 타인의 존경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진짜 권위의 '위엄'일 때 진정한 해당 단어의 뜻에 걸맞은 미덕을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짜 위엄과 진짜 위엄을 지닌 사람을 구별하여 곁에 두거나 멘토로 삼는 일은 심지어는 내 삶의 향방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보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진짜 '위엄'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에 생각보다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개를 숙여도 그 '위엄'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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