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여름 코펜하겐 한복판에 있는 서점에서 한강의 “희랍어 수업”이라는 책을 보게 되어 설명할 수 없는 영감을 받아 그리스어를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채식주의자”도 아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품이 마침 서점에 전시되어 있던 것이다. 이런 우연에 순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덴마크어를 배우는 것도 나쁠 것 없지만 남편의 모국어인 그리스어에 좀 더 신경을 쓰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몇 년 동안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리스에 살지 않아서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은 이유가 크겠다) 제대로 배울 생각이 들지 않던 그리스어이다.
10월 중 남편과 크레타섬에 휴가를 가있는 동안 현지에서 진행하는 온라인 그리스어 수업에 등록했는데, 그러는 사이 또 우연하게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크레타에 있는 동안 접하게 되었다. 우연에 또 우연이 겹쳤다. 일련의 의미 있는 우연, 칼융은 이런 걸 보고 싱크로니시티라고 했던가. 한강 작가가 어쨌든 나를 위해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떻게 어렸을 때부터 인생 흐르는 대로 세계를 누비다 보니 이미 20대부터 4개 국어를 하는 폴리글롯 (polyglot 다국어 사용자)으로 살아왔지만 유럽언어 두 개를 더, 그것도 40대 후반에, 추가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고 5년 전까지만 해도 계획에도 없었다.
오늘 첫 수업을 했다. 선생님의 이름이 어떻게 또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리끼(영어로는 안젤라)이다. 학생은 나와 다른 독일 여자분 이렇게 딱 두 명이라서 거의 프라이빗 수업이었다. 독일 여자분은 이제 막 은퇴를 하신 60대 여성분인데 남편과 함께 내년부터 그리스의 크레타섬에서 1년에 6개월씩 살기로 했단다. 그래서 그리스어도 배우는 거라고 했다. 이미 공부를 어느 정도 했는지 알파벳도 이미 익혀서 완전 초보는 아닌 것 같았다. 나도 그리스어를 정식으로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몇 년 동안 그리스인 남편과 살면서 그리스어를 자주 접해서 희랍 알파벳은 물론 기본 표현들은 웬만하면 구두로 다 익혔다. 오늘 알파벳과 일부 규칙을 차근차근 정식으로 배웠다. 서양언어의 근간이 된 이 고대언어를 배우면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너무 익숙한 동시에 너무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