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영 Aug 05. 2023

미술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도 그날 가장 충만히 올라온 동기가 실은 ‘오늘의 미술’이다.
어쩌면 즉흥적일 수도 있는 앞뒤 없음으로 진짜 미술은 일어난다.      






“프로그램을 좀 볼 수 있나요?” 

“아니요, 프로그램을 정해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엄마들은 의아해한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학원을 등록할 수는 없을거다. 프로그램이란 월마다 어떤 주제의 수업을 하는지 정리된 표다.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매우 프로그램 중심이다. 아이들은 보통 잘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미술을 만난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프로그램을 묻는다. 

그런데 난 좀 생각이 다르다. 

미술이 체계적일 수 있을까.  

   

나도 과거 매월 프로그램 안내문을 발송했다. 인터넷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고 필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를 검색했고, 연령에 맞게 난이도를 구분하고 주제와 재료를 정했다. 꽤 체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내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미리 안내문이 나갔으니, 오늘의 프로그램을 어쩔 수 없이 지켰다. 

그런데 실제 수업에서는 프로그램을 변경해야 할 경우들이 생겼다. 

    

아이가 여행을 다녀와서 동기부여된 마음들, 갑자기 뭔가 억울하거나 화가난 일이 있어서 감정이완이 필요할 것 같아 주제를 변경하거나, 오늘 날씨의 변화가 마음에 들어온 날, 아이가 주어온 나뭇잎과 벌레로 생기는 일들, 새로운 아이가 오면 기존 아이들과 어떻게 미술을 조화롭게 성장시킬 수 있을지. 내가 본 전시나 읽은 책으로 떠오른 영감을 아이들과 연결시켜보고 싶다거나.. . 미리 나간 프로그램 때문에 즉각 반영과 수정이 어려웠고 그 프로그램 자체가 아이의 표현 욕구를 없애고 있었다. 교사인 나도.     


프로그램 안내문은 체계적인 미술로 보이고 싶은 페이퍼워크 였다. 재미없는 일.

이 미술에 내가 먼져 나가 떨어졌다. 내가 홈스쿨을 하던 당시 미술수업이 곤욕이었던 건 단순히 혼자 일하고 수업을 나눌 동료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미술 프로그램 틀에 빠져 생기없는 미술을 억지로 한 것이 문제였다. 체계적인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물론 다양한 미술프로그램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건 교사의 고정되지 않는 마음가짐, 유연성과 융통성이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릴 동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는 동기를 충분히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고, 교사는 수업의 온 마음과 온 몸의 에너지를 끌어모아 이 날의 주제 도입에 성공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도화지에 건물을 그리세요!”이렇게 미술을 출발할 수는 없다. 이건 마치 배우에게 “지금부터 연기를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배우가 연기를 하기 전에 감정을 잡고, 그 캐릭터에 몰입이 필요하 듯, 운동선수가 시합을 하기 전 몸을 푸는 거와 같이, 아이들에게 그 날 가장 충만히 올라온 동기가 실은 ‘오늘의 미술’이다. 어쩌면 즉흥적일수도 있는 앞뒤 없음으로 진짜 미술은 일어난다.      



마이클스코긴스 작업



미술교육학자 로웬펠드는 미술표현이 ‘자아동일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과 동일화되지 못한 표현은 창의성을 잃게 된다고 일갈했다.

자아동일화란 자기와 동일시 되는 하나 되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모든 수업이 동일화되지는 못할 테지만,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이 아이들에게 자아동일화되지 못한 채 진행되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새로 학원을 열면서 프로그램 표를 게시해두지 않았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닌 ‘교수법’이었다. 무엇’을 가르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떻게’가 내겐 중요했다.

순서를 바꿨다. 미리 프로그램을 정해두는 것이 아니고, 프로그램을 다 진행하고 선생님들과 피드백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회의 때 선생님들은 자신의 수업을 발표했다. 수업 중 일어났던 상황, 수업을 하며 느낀 점, 사용한 재료의 팁, 연령별로 주의했던 점, 작품 결과, 아이와 엄마의 반응, 그리고 망쳤던 사례. 이 자리는 프로그램을 나누는 자리이자, 교수법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정해진 미술 프로그램이 없다보니, 선생님들은 아이에게 필요한 미술을 찾고, 선생님 스스로도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을 용기있게 실천했다. 



자이언트 햄버거



동료 교사끼리는 빠른 피드백을 주고 받고, 자신의 반 아이들 상황에 맞게 적용했다. 나도 어떤 날은 아이들과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토론 같은 이야기를 나눴고, 어떤 날은 음악을 들으며 색을 탐구하거나 칠했으며, 어떤 날은 마치 쓰레기와 같은 자유 만들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갑갑할 수 있었던 미술에 쉼과 여유도 들어왔다.      

미술교사와 아이들이 마음껏 미술을 일으키려면 엄마의 ‘신뢰’가 필요하다. 

종이에 잘 정리된 프로그램 표보다 프로그램 ‘너머의 것’을 생각해보는 엄마의 안목.

프로그램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수업 시간 내에 ‘도화지에 그려낸 것 너머’를 상상해보는 마음. 


체계없는 미술기관은 어쩌면 창의성을 키우느라 그 체계를 버렸는지 모른다. 이제는 아이의 미술교육 기관에 상담을 간다면, 프로그램 대신 교수법을 물어보면 좋겠다.

“이 곳은 어떻게 미술을 가르치나요?”

 이미 다 정해진 프로그램만으로 미술을 한다면, 우리 아이가 정말 재미없을 테니까.     






미술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연구합니다.

인스타그램 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