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갔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앞서서>
enfj와 istp 글이 항상 제 브런치의 조회수 1등입니다!
istp로 인해 고민이 많은 enfj가 많은 걸까요? 그럴만한 시크한 istp들이죠.
그나저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 얘기를 사람들이 많이 읽어준다고 아무리 말해도 한 번도 이 글을 찾아 읽지 않는 나의 짝 istp에게도 감사함을 …!
우리는 2019년 10월에 사귀었다. 그 말은 2달 있다가 코로나가 미친 듯이 퍼졌다는 이야기다. 해외여행을 가보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국내 여행만 주야장천 다녔었다.
하지만! 드디어 코로나가 진정세를 보였고, 우리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엄마 몰래 여행을 가야 했어서 (…) 너무 먼 곳은 불가능했고, 가장 편안하게 갔다 올 수 있는 일본을 가기로 했다. 도쿄에는 사촌언니가 살고 있기에, 사촌언니 집에도 인사를 가기로 했다.
흔히들 연인과 해외여행을 가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거기서 큰 싸움이 나냐 안나냐의 여부가 우리 관계의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계획할 때부터 약간의 긴장감은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enfj와 istp는 너무 달라버려서 또 그렇게 큰 싸움은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의 짝 istp는 무언가를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조건 싼 것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할인율이 큰 것을 찾았을 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5만 원짜리를 정가에 사는 것보다 100만 원짜리를 80만 원에 할인해서 사는 게 더 행복하단다. 그래서 istp는 이번 여행에서도 비행기표, 숙박, 디즈니랜드 티켓 등 모든 걸 싸게 사고 싶어 하느라 안달이 났다. 나는 그런 것에 젬병이라서, 가만히 멍 때리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모두 해결됐다. 시작이 좋았다.
나는 어느 정도의 계획을 정해야 한다. 그래서 여행계획표라는 걸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째 날 어딜 갈 건지, 둘째 날은 뭘 먹어볼 건지, 도쿄 디즈니랜드는 몇 시부터 갈 건지 등등. 이런 게 있어야지 그래도 여행이 좀 수월하지 않겠는가? istp에게 그걸 보여줬더니, 자기는 이런 걸 만드는 사람을 처음 본다고 했다. 그러더니 슬쩍 그 파일을 저장해 놓고 매일매일 쳐다보더라.
istp는 여행을 하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절대 현지인한테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라면 덥석 아무나 잡고 길도 묻고, 메뉴도 묻고, 이것저것 다 물어볼 텐데 istp는 그런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도 맘 터놓고 모든 모습을 다 보여주는 유일한 사람이 나인 사람이고, 이번 여행에서 본인의 가장 활발한 모습으로 다니는 걸 보니 나도 마음이 좋아서 istp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뒀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기는 앞으로 해외여행은 나랑만 다니고 싶다며 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런 모습을 본 나는 또 한 번 istp들은 참 껍데기와 알맹이가 다르다고 느껴졌다.
나는 디즈니나 픽사를 사랑한다. 그런 나에게 디즈니랜드는 천국? 극락? 뭐 그런 곳이다. istp는 놀이공원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가서 열심히 즐겨줬다. 심지어 미키모양 선글라스까지 쓰고 …! 도쿄에는 미녀와 야수 어트랙션이 매우 유명하다. 거의 평균 60분은 기다려야 하는 곳이라서, 들어가자마자 유료 티켓을 사버려야 한다. 나는 istp를 채찍질하며 얼른 빨리 그 티켓을 사야 한다고 했다. 오전 10시에 우리는 오후 4시 티켓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웬걸 오후 3시쯤 어플을 들어가서 다시 확인해 보니, 정작 내가 티켓팅에 실패한 상태였다. 그것도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던 나는 극심한 우울감에 휩싸였다. istp는 자기 티켓 가지고 너 혼자 타고 오라고 했다. 나는 너무 미안하고 자책감이 들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istp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자기는 정말 안 보고 싶으니 제발 자기 티켓을 가져가달라고 했다. 오히려 2만 원을 아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그렇게 나는 혼자 미녀와 야수 어트랙션을 탔다. (이 와중에 너무 재밌고, 압도적이었다. 앗싸.)
istp가 얼마나 사람에 대해서 귀찮아하는지를 아는 나는, 사촌언니와의 만남이 조금 걱정됐다. 이것이 혹시나 그에게 부담이 될까 봐 재차 물어봤지만 그는 너무 좋다고 했다. 심지어 6살 꼬맹이 조카 줄 카디건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갔다. 그는 조카와도 잘 놀아주고, 사촌언니와도 만담꾼처럼 이야기했다. 같이 갔던 회전초밥 집에서는 평소에 먹지도 못하던 초밥들까지 먹어치웠다. 어차피 가족이 될 거라면, 미리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았다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참 컸다. 쓸데없는 말이겠지만, 전 남자친구는 내 가족과 만날 필요성도 못 느꼈을뿐더러 선물은커녕 제대로 준비조차 안 하고 만났었다. 나의 가족에게 어떻게 대하는지가 한 사람의 성품을 많이 보여준다. 물론 그건 mbti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겠지만.
그와 사귀면서 느끼건대, 나는 그에게 물감 같은 존재고, 그는 나에게 연필 같은 존재다.
나는 알록달록하고 통통 튀는 인생을 산다. 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현실에 대해 받아들일 때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럴 때 istp가 나의 선이 되어준다. 한계선을 잡아주고, 내 인생을 더 구체화해 주는 연필이 되어준다.
그는 그렇지만 내가 없으면 인생에 별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와 함께하고 나서 인생에 많은 색깔이 생겼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그런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