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0년대 반짇고리 수출 이야기
공방에서 ‘명화’라고 부르는 원단이 있다.
총 4종류인데, 어느 명화를 자카드 원단으로 짠 원단
베이지색 밝은 톤으로 된 꽃 패턴 자카드 원단
검은색 베이스에 장미 문양이 짜인 자카드 원단
큰 꽃, 작은 꽃 2종
이 원단은 내가 기억하기 훨씬 전, 리가 이 사업을 본인 이름으로 도맡아 시작하기 전부터 꽤 많이 수출을 했던 디자인이라고 한다. 러시아에 주로 수출이 됐었는데 그때에는 컨테이너를 채워서 나갔었다고. 이제는 한국 인건비가 많이 올라서 중국 공장으로 거래처가 빠져나갔고 또 반짇고리 품목에 대한 주문 자체도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밤을 새워서 마감시간을 맞추던 게 생각난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는 나도 마감작업에 차출되었는데, 주로 마감 레이스를 바르거나 포장하는 일을 도왔다. 포장보다는 혼자서 노래를 들으며 할 수 있는 레이스 바르는 일을 선호했다.
수량은 100개, 200개… 숫자를 셀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반복 노동을 하다 보면 내가 지금 몇 개째를 바르고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때가 왔다. 처음엔 조금 좀이 쑤시고 이제 30개 했다, 이번엔 1시간에 몇 개를 더 빨리 해볼까, 하면서 나름의 게임을 하는 시기가 있다. 그때를 지나면 무아지경의 상태가 된다. 한쪽에선 계속 나에게 마감할 물건을 갖다주고 한쪽에선 내가 마감한 물건에 장식을 달아 포장한다. 난 다른 직원분들에 비하면 손이 느린 편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얼마나 물건이 남은 건지, 얼마나 포장이 된 건지 알고 싶지도 않은 채로 나와 내 눈앞에 작은 테이블만 남는 때가 온다. 난 이걸 바를 뿐이고 내 눈앞에 얘는 발릴 뿐이다. 지겹다거나 힘들다거나 언제 끝나나 같은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항을 보며 물멍하는 고양이마냥, 프로그래밍된 기계마냥 움직인다. 나중엔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는데, 그때에는 오히려 자유롭다. 정말 뇌가 다른 곳에 가 있다. 아마 난 이 시간들 덕분에 현실에서 정신을 분리시켜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미술학원에서 오래 그림을 그리면서 자주 하던, 그림은 내 손이 그릴뿐, 내 정신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있지, 하는 생각의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일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하는 때에 잘 안되면 공방에 가서 일을 하면서 머리를 푼다.
인간은 어쩌면 다양한 형태의 노동을 골고루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신체 노동(단순 반복 노동)을 하며 머리를 식히고 몸을 움직이다가, 생각 노동(기획/창작 노동)을 하며 머리를 쥐어짜다가. 나에게는 그 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일주일이 꽤 안정적이었다. 신체 노동이 머리에게는 여가 시간이 되었고 생각 노동은 몸에게 휴가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