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릭과 충분조건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것이나, 나의 입력보다 과다한 보상들이 쟁취되는 상황을 겪을 때가 있다.
우연한 행운의 경우를 배제하면, <도둑질>과 <현실적응능력>의 양극 사이, 어떤 회색 지대를 생각해 본다.
<모호함>, <여운> 또는 <일탈>의 가면 속에 회색지대를 만들고 그 속에 매몰되기도 한다.
내면에서 <양심>과 <자기 합리화>의 사뭇 충돌과 타협들이 반복되겠지만, 의도의 투명성은 궁극에 드러나게 된다.
크로스컨트리 경주 중, 케냐 선수 아벨 무타이는 결승선을 몇 걸음 앞두고 이미 경기가 끝났다고 믿으며 천천히 조깅 속도로 줄였다. 그 뒤를 바짝 따르던 스페인 선수 이반 페르난데스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무타이에게 소리치고 손을 흔들었지만, 무타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페르난데스는 무타이를 제치고 달리는 대신, 그의 옆에 다가가 손짓으로 결승선을 가리켜 무타이를 안내해 주었다. 무타이가 정당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후 기자들은 페르난데스에게 이유를 물었다.
페르난데스는 말했다. <저는 정직과 친절이 먼저인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당신이 이길 수도 있었잖아요>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페르난데스는 <그는 이미 앞서 있었어요, 진정한 승리가 아닌 메달을 받아서 무슨 영광이 있겠어요? 그런 메달을 가지고 어떻게 어머니 얼굴을 뵐 수 있겠어요?>
이야기 속에서 2등을 스스로 받아들인 페르난데스의 행동은 자신을 기만했거나 <조작> 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진정한 자유를 쟁취한 것일까?
<아름답다>를 메트릭으로 정의한다면, 최고치의 충분조건은 <겉과 속의 일치>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함수의 곡선 구간에서 탄젠트가 제로가 되는 지점으로 비유해 본다.
다소 외모가 떨어지는데 마음은 의외로 천사 같은 사람은 일반적으로 아름답다지만 최고는 아니다.
얼짱에 몸짱인데, 성격이 음흉하고 오만한 경우는 탄젠트가 무한값이다. 즉, 나의 메트릭에선 최저치다. 떨어지는 외모만큼, 마음도 적당히 모가 나 있고, 그것을 숨기거나 <조작> 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외모지상>과 <물질만능>을 밀접하게 묶인 이데올로기로 본다. 자본주의 말기에 누구도 피해 가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내가 아닌 나를 <조작>하는 성형시술로 보기 좋아졌고, 내면도 함께 업그레이드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조작>은 실존에서 멀어진다. 사르트르가 언급한 <회피>와 <외면>은 중독성이 강하다.
얼굴과 몸의 개선은 마음의 업그레이드로 얻어지는 보너스여야 한다. 순리적 순서가 그러하다.
타인의 글과 논문들을 짜깁기하는 것도 능력일 것이다. 소매치기 달인의 안창 따기도 마술의 영역에선 예술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학문적 노블티(novelty)는 문헌검색(literature work)이 보장하게 된다. 학위 논문을 쓸 때, 배당된 시간 중, 보통 문헌검색에 50% 이상 을 할당 하게 된다. 지금 내가 하는 연구가 다른 누군가가 이미 시작해 본 연구라면, 나의 접근은 그것과 얼마큼 다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오롯이 천착해야 한다.
나의 경우도 네 학기 동안 논문을 썼었고, 첫 두 학기는 문헌검색으로 보냈다.
나와 비슷한 타인의 연구는 언급되어야 하고, 나의 학문적 노블티를 지킬 수 없다면 접근이나 주제를 바꿔야 한다.
조작된 외모는 허한 지적 용량과 인격 결핍을 가려 줄 수 없다. 아름다운 마라톤 선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우리들의 <아름다움>
그 메트릭과 충분조건은 무엇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