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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지 Nov 20. 2024

꼭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 잘 잊히지 않는다



오늘은 슬픈 이야기를 제쳐두고 나를 지탱하는 작은 기쁨에 대해 나열해보려 한다.


우선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더라


대학에 합격한 날, 자격증을 취득한 날, 처음 해본 소액 주식에서 70% 이득을 본 날..


그런 눈에 보이는 성과, 빨간색 효율들이 바로 떠오를 줄 알았는데 미생의 삶은 그런 게 아닌 듯하다.


명작으로는 대부를 뽑지만, 계속 돌려보는 건 펄프픽션인 것처럼


내가 계속 곱씹게 되는 행복들





나는 란마 ½ 애니를 다시 봤을 때. 


매일 란마를 생각하진 않지만, 중성적인 매력으로 인기를 끄는 신인 배우들을 볼 때마다 란마 실사화에 나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카하시 루미코(란마 ½) 작품을 같이 덕질해 줄 mz세대 많이 없겠지?라고 약간의 서글픈 생각에 빠져있을 때 즘 넷플릭스에서 란마를 리메이크하겠다는 소식에 요 며칠 엄청 행복했다.


생각보다 리메이크의 짜임새가 훌륭하진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잊히지 않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좋아했던 것을 여전히 좋아할 때 짜릿하다.



처음 만들어본 알리오올리오의 맛이 훌륭할 때.


주방이 말도 안 되게 좁아서 조리만 했는데, 요리도 할만하다

가장 가성비 좋다는 알리오올리오로 첫 요리를 시작해 보니 꽤나 맛있다.


특히 칵테일 새우를 내 맘대로 6~8개를 넣어먹을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다.

주 3회 이상 먹고 있는데 나름 탄단지 비율을 잘 맞춘 식단이다. 


자취를 시작하고 파스타 정도는 해 먹을 수 있게 된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출퇴근 길에 학교가 있어 배웅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


집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 매일 출근할 때면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을 만난다. 


스마트폰만 보고 가느라 나랑 부딪힐 뻔한 아이도 있고,

어디서 배웠는지 아저씨들도 안 쓰는 거친 욕을 쓰는 아이도 있지만


"엄마 나 학교 갔다 올게~" 외치면서 뛰어가는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뛰지 말라고 소리치며 그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는 엄마를 볼 때면 출근길이 몽글몽글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보는 사람.

보기 드문 모습을 아침마다 볼 때 행복하다.




집 앞의 고양이가 날 보고 도망치지 않을 때.


반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에 길고양이 세 마리가 있다.

그중 두 마리는 운 나쁘게 지차에 or 자원봉사자의 눈에 띄어서 중성화수술을 당한 아픔이 있다.


인간에게 거세당한 생명체들이 인간인 나를 보고 피하지 않다니


집에서 알리오올리오만 만들어대면서 일기 쓰는 나를 창문으로

몇 달간 지켜보고 해를 가하지 않을 사람이란 판단이 들었나 보다.


경계받지 않는 인간 타이틀을 획득해서 행복하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다시 수능을 보면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을까?

그날 자격증 시험을 보지 않았다면 아빠를 심폐소생술로 살릴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심은 끝도 없이 자리 잡는다.


만일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버튼이 생긴다고 해도 누르지 않는 현재를 살고 싶다.


지금에 만족한다면 구태여 돌아가고 싶지 않을 테니


애니메이션 재개봉에 울고 웃고, 고양이랑 친해진 걸로 평생 만족하는 삶은 아니었으면 하지만..


작은 것 하나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행복의 역치가 낮은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 



원했던 대학교 입학식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보다

아빠의 등에 업혀 잠들어있는 나의 5살 사진을 

더 오랜 시간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모든 행위를 효율성으로 분별하지 않고

주식으로 연결 짓지 않고, 손익으로 결과를 판단하지 않는 삶


비트코인을 사지 않은 것보다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한 게 더 후회되는 인간성을 남겨두고 살아가고 싶다.



영원히 대수롭지 않은 것에 울고 웃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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