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의 너에게
#병원에서
가끔은 불행이 일어나기 전에 절대 일어날 수 없는 농밀한 대화가 있다.
2008년, 배낭을 메고 인도로 떠날 때 나는 사막 위에 누워 베토벤의 운명을 듣고 싶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었고 더웠고 기차를 점령한 바퀴벌레와의 전쟁이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바닥에서 벽에서 랜덤 몬스터처럼 튀어나오는 거대한 바퀴벌레들에 지쳐갈 즈음 도착한 곳, 붉은 성, 자이살메르.
홀리(holy)를 앞두고 그곳을 뒤덮고 있던 아슬아슬한 충동들, 빨갛게 메마른 모래와 향신료가 뒤섞여 만들어낸 독특한 향기... 빨아도 빨아도 염색물이 멈추지 않던 오렌지색 머플러로 해를 가리고 도착한 그곳에 사막이 있었다.
뜨겁고 강렬했지만 형체는 없었다. 단단하지도 묽지도 않은 발밑의 감각과 손아귀에서 스르르 사라지는 모래알의 감촉. 바람이 만드는 고혹적인 무늬들과 파닥파닥- 뜨거운 모래 위를 뜀질하던 도마뱀들. 사막의 낮이었다.
어둠이 쏟아지고 별이 빛나는 밤, 두꺼운 담요를 뒤집어쓰고 모래 위에 누워 mp3 player를 꺼냈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단 한 곡뿐이었다. 그 여행을 위해 나름 공들여 준비한 단 하나의 계획이기도 했다. 익숙한 전주부가 흘러나올 때 밤 10시 사막의 공기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고 시리고 차가웠다. 사파리를 위해 급조된 일행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술과 마리화나에 몰두해 있었고 이리떼가 사람 냄새를 맡고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보름달이 살며시 떠오른 사막의 하늘에 클라리넷의 맑은 배경음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30여 분에 달하는 운명교향곡을 2악장 어딘가에서 멈춰 버렸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운명은 그저 아름다운 배경이었을 뿐 별다른 감흥도 대답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이십 대의 가여운 열정은 항상 무언가에 도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나이 모두가 그렇듯이 성에 차지 않는 결과물과 채울 수 없는 타인의 만족의 깊이에 짓눌리곤 했다. 그러함으로 시작된 나의 '운명'이벤트는 흩날리는 모래처럼 날아가 어둠의 층 속 어딘가에 버려졌다. 그 장엄한 선율들은 내 귓가에서만 머물다가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시절 나의 존재처럼. 아마도 그때 그 선율이 가져다준 한 점의 요동라도 있었다면 그걸 빌미로 다른 일을 시작해 볼 수 있었을 테지. 아니다. 확실히 그것을 위한 기획이었을 텐데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어느 것도 동기가 되지 못했던 밤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주일쯤 더 머물렀다. 사막은 상상보다 아름다웠고 감정으로 흘러넘쳤다. 잊고 있던, 묻고 있던 돌아가신 아빠가 매일 밤 꿈으로 찾아왔다. 밤 중에 일어나 실컷 울기를 며칠 반복했다. 모두가 잠든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방인의 땅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감정의 골을 깊이 건드린다. 온전히 나는 나에서 벗어나 쓸쓸한 마음을 쓰다듬는다. 내밀했던 고민 역시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진중함을 털어내곤 한다. 깃털처럼 가볍게. 세상은 넓으니 한 낱 고민에 슬퍼하지 말라고. 우주의 작은 돌멩이라도 된 듯이... 하찮게 살지 말자고. 농밀하고 처참했던 감정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된 용기 역시 그런 이국적인 냄새와 느낌들에 기인했으리라. 사막이라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꽉 뒤틀린 스펀지처럼 물기 빠진 사막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이 흘렀고 눈물이 흘렀다.
이곳 병원에서 비슷한 그때의 감정들과 그때의 나일 거라 짐작되는 사람들과 마주한다. 환자복과 일상복 사이… 무언가 너머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일상의 것 외에는 말하지 못하며 기어이 일상만 건드리고 마는. 쓸쓸함, 불안 그리고 안정이 교차하는 곳. 수많은 상념이 무거운 병 앞에 스르륵 사라지는 곳.
병원은 오늘 내게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