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될 때도 있어요
전화위복이라는 옛말이 있다. 좋지 않은 일이 오히려 좋은 일로 바뀐 상황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말레이시아의 여행이 딱 그랬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일요일에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고,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돌아와 다시 한국행 비행기로 환승할 예정이었지만, 그 계획은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모두 틀어졌다.
KL 공항은 쿠알라룸푸르 중심지에서도 차를 타고 40분이나 가야 하는 곳으로 혹여라도 출/퇴근 시간에 공항에 가야 하는 경우에는 꼭 평소보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이동해야 한다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조언해 주었다. 그래서 혹여라도 평일 출퇴근만큼은 아니어도 일요일 아침에 시외로 나가는 차량 때문에 공항에 갈 때 차가 막힐까 봐 예정보다 10분이나 일찍 준비를 마쳤다.
전날 늦게까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 후 아침 일찍부터 부산히 준비하여 몹시 피곤하여 택시에서 눈을 붙이려고는 하였지만 이곳을 떠난다는 아쉬움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았다. 택시가 한참을 달리다 보니 창 밖의 풍경의 고층 건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며 조금씩 공항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공항까지 오는 길에 차가 막히지도 않았고, 공항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 체크인을 하고 입국수속을 마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면세점에서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 카페에서 마실 것 정도만 사서 창가에서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보며 게이트 오픈 시간을 기다렸다. 입국 수속 전 기내 수화물 검사를 하는 한국과 다르게 말레이시아의 경우는 개별 수화물의 검사를 게이트 바로 앞에서 진행한다. 게이트에서 수화물 검사가 끝나고 잠깐 대기를 하고 나니 금방 기내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렇게 마음속에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며 말레이시아와 작별 인사를 하고, 좌석에 앉자마자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비행기에서 내려야 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와서 시계를 얼추보니 예정 시간보다 한 15분 정도 빨리 도착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비행기의 이착륙 때의 느낌도 못 느꼈을까 하고 생각하며 짐을 챙겨 내렸다. 하지만 막상 내가 내린 곳은 싱가포르가 아닌 비행기를 탔던 쿠알라룸푸르의 공항의 게이트였다. 알고 보니 내가 잠든 시간 동안 비행기가 이착륙을 한 것이 아닌 기술적 결함 요소를 체크하고 있었고, 결국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해 승객을 모두 내리게 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승무원들이 한두 시간 정도 시간을 예상한다고 했고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아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마음 편히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예정 시간에도 비행기 탑승 안내 방송은 없었고, 되려 승무원들이 말을 바꾸어 언제 다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점심을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나름 런치 박스 정도는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준비해 준 점심은 Quick Bite라는 빵 한 개와 물 한 컵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이 역시 항공사의 규정에 따라 비행기의 지연이 2시간 이상 되었기 때문에 제공하는 서비스라고는 하며, 생색을 내는 모습이 탐탁지 않았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점심을 빵과 물을 나눠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나를 비롯해 싱가포르에서 환승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일부 승객들은 환승 비행기를 놓칠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싱가포르에서 환승하는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별도의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이에 일부 승객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항의를 했지만 항공사 직원들은 보상해 줄 수 없음 말을 기계적인 반복하고, 별도의 대안책을 마련해주지 못했다.
나 역시 항의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차라리 쿠알라룸푸르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출국 수속을 마무리하였고 수화물까지 짐을 부친 상황이라서 출국 수속을 취소 처리하고, 이미 부친 개인 수화물을 다시 빼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쿠알라룸푸르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도 모두 밤 비행기 밖에 없었고 가격도 당일에 구하는 티켓이다 보니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어, 돈을 더 주고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가능 비행기의 시간을 밤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밤 비행기로 수수료를 지불하고 비행기표를 바꿀 수 있었던 나는 그나마 운이 좋았고, 어떤 승객의 경우는 갑작스러운 연착 때문에 당장 다음 날의 모든 일정이 다 꼬여 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된 보상도 없는 상태에서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대체용 비행기가 투입되어 싱가포르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겨우겨우 돌아온 싱가포르는 너무나도 반가웠지만 이미 팀원들은 모두 싱가포르를 떠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뒤였다. 몇 시간 되지는 않지만 짐을 공항 락커에 맡겨두고 도심지로 나가 저녁이라도 먹고 와야 하나 생각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싱가포르의 친구가 공항에 있는 쇼핑몰인 쥬얼(Jewel)까지 와서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고 해, 쥬얼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쥬얼에서 Yun Nans라는 운난 성(Yunnan) 음식으로 저녁도 먹고 후식으로는 Birds of Paradise라는 싱가포르에서는 꽤나 유명한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이곳은 다양한 종류와 그 맛 때문에 인기가 많아서, 평소에는 꽤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곳이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운이 좋게도 20분 남짓한 시간만 기다리고 아이스크림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우리는 레인 볼텍스(Rain Voltex)에 앉아서 색색이 변해가는 물을 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우린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동안은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고 보여주지 않았던 서로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어쩌면 친구가 쥬얼로 와주지 않았다면 말레이시아의 여행은 비행기 결함과 함께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으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오히려 싱가포르에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말레이시아의 여행이 너무 나쁘게만은 기억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짧은 말레이시아의 여행은 예기치 못하게 싱가포르의 쥬얼을 나와 친구에게 조금은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주면서 끝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