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였던 사람
초여름 냄새가 기분 좋았던 5월의 마지막 날 저녁, 나는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연극 ‘채식주의자’를 관람했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소설 ‘채식주의자’가 원작인 이 작품은 제22회 부산국제연극제의 폐막작으로 초청되어 이탈리아 극단이 이탈리아어로 연기를 했다. 자막은 무대 위쪽 여백에 배우들의 대사와 같은 속도로 영어와 한국어로 번역되어 감상하기 편안했다.
한강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채식주의자’는 가장 읽기 힘든 작품이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다소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읽다가 몇 번 멈춘 기억이 있다. 연극을 보기 며칠 전 ‘채식주의자’를 다시 정독했다. 역시 힘든 장면에서는 심호흡을 하며 책장을 넘겨야 했다. 그리고 영혜의 입에 고기를 억지로 집어넣는 장면, 영혜의 나체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연극에서 어떻게 표현할지 정말 궁금했다.
공연장은 만석이었고, 무대 세트가 드러나자 옆 좌석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긴장감과 고요함이 감돌았다. 처음에는 배우들의 독백이 너무 길어서 연극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대사는 원작 소설의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겼고, 인물 간의 대화보다는 한 명씩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이야기하는 길고 긴 독백으로 진행되었다. 저렇게 긴 대사를 어떻게 외웠을까. 깊은 경외감이 들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서서 번갈아가며 소설을 외워 낭독하는 듯한 느낌도 들어서 연극이 아닌 낭독회를 관람하는 듯한 지루함이 생기려는 차에 연출가의 마음이 다가왔다.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한국 소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연극으로 만든 이탈리아 연출가의 마음을 생각했다.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이 하나같이 섬세하고 시적이고 사려 깊어서 쉽게 대본으로 각색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원작을 보존하며 극적 전달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을 무수한 고민들이 무대 위로 그대로 옮겨진 것이었다. 나는 점점 몰입해 갔다.
영혜의 입에 고기를 넣는 장면도 배우들의 대사만으로 이루어졌는데, 배우들이 똑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며 대사를 하다가 동시에 각자의 뺨을 스스로 때리는 연기의 전달력은 엄청났다.
몸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나체의 영혜가 벽에 기대어 있고 떨어져 앉아 있는 형부는 영혜의 몸에 빛을 쏜다. 그리고 빛이 반사되는 판 위에 물감을 떨어뜨려 붓으로 터치해 가며 마치 영혜의 몸에 직접 색칠을 하는 듯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오버헤드 프로젝터를 사용해 ‘라이브 드로잉’, ‘프로젝션 맵핑’을 이용한 것이라고 한다. 빛과 그림자를 아름답게 활용했고, 음향과 조명은 조화로웠다.
함께 무대 위에 서 있던 영혜의 남편, 언니, 형부도 폭력적인 꿈을 꾼 이후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은 많은 이들은, 영혜는 식물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으로 육식을 거부하고 세상의 폭력과 맞서는 존재라고 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연출하고 작품에서 영혜의 언니 ‘인혜’ 역을 맡은 ‘다리아 데플로리안(Daria Deflorian)’은 소설을 읽고 폭력에 맞서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것의 어려움에 포착하여 전 세계적인 메시지로 받아들이며 연극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연극을 완성하는 것은 “관객들의 몫”이라는 열린 해석을 던져주었다.
폭력에 맞선다는 관점은 유사하지만 연극을 보며 내가 떠올린 생각은 ‘영혜는 원래 식물이었는데 인간인 줄 알고 살았던 것 아닐까?’였다. 식물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옷을 입어야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싫었을까. 그래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육식부터 먹지 않게 된 것이다. 흙에 심겨 한 곳에 머물러야 할 식물이 남편을 위해 살림을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고기를 먹었다. 바람과 햇살, 흙 속의 양분과 물이면 충분했는데, 남편에게 복종하며 흐릿하게 살았던, 삶이 고달팠던 이유를 어느 날의 꿈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용감하게 자신의 본성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이다. 옷을 입지 않고 음식이 필요 없는 식물로 돌아가 지구에 뿌리내리기 위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영혜는 잊고 있던 자아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본성에 이끌려 숲으로 도망가듯 자신을 찾으러 달려 나갔고, 그 속에서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모든 음식을 강력하게 거부한 채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자신의 존엄한 가치와 생존은 어떤 방법으로든 지켜 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체의 근원적 본능이다. 나무가 되기를 원하기 전에 원래 나무였던 영혜였을까. 소설의 마지막 장면, 구급차를 타고 가던 영혜가 했던 말은 “어쩌면 꿈인지 몰라.”였다.
나무였던 것이 꿈인지, 나무가 되고자 했던 것이 꿈인지. 꿈은 영혜를, 우리를 어디로 데려갔다 내려놓았을까.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커튼콜이 몇 번이나 계속되며 꿈같은 연극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