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을 노래하려고 할 때마다 사랑은 고통이 되었고, 고통을 노래하려고 하면 그 고통은 사랑이 되었습니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의 표현입니다. 슬픔 속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세상을 가장 즐겁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돕고 정신을 강하게 합니다."
"나는 매일같이 아프고 힘들지만, 내 음악으로 인해 사람들은 행복할 것입니다."
-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20대 중반이었던 1822년 절친 프란츠 쇼버를 따라 사창가에 갔다가 당시 유럽에 창궐하고 있던 매독에 감염됩니다. 그 후 전신에 발진이 생기고 극심한 관절통을 수반한 통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투병생활을 해야 했는데, 당시는 아직 뾰족한 치료방법이 없이 수은연고를 온 몸에 바르는 치료 등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치료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투병의 과정이 요즈음 말기 암환자의 투병 과정 이상으로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었다는 점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탈모로 인해 결국 가발을 써야 했고. 팔의 통증으로 피아노조차도 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치료행위에 수반된 수은 중독의 부작용으로 인해 슈베르트는 우울증은 물론 간헐적 환각증세와 함께 신경이 극도로 쇄약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슈베르트는 격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1827년부터 수많은 걸작들을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마지막 해인 1828년에 작곡된 노래 가운데는 예상 밖으로 따스하고 희망가득한 느낌의 노래도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러한 (약박에 붙은) 스타카토와 악센트의 조합은 역시 1828년에 작곡된 슈베르트의 제20번 피아노 소나타 D 959의 2악장 안단티노에서도 거듭 사용됩니다.
이 악장은 그 소나타의 다른 악장은 물론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의 모든 악장 가운데서도 마치 홀로 저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외로운 섬과 같이 낯선 느낌마저 주는 특이한 곡입니다.
이 악장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거의 발작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표현들, 이어지는 (즉흥곡 D899 3번의 선율에 의한) 마음의 추스림과 체념도 슈베르트의 당시 심리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만, 곡의 처음부터 내내 이어지는 (약박에 붙은) 여린 스타카토와 악센트는 음표에 새긴 그의 육체적 고통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아래 악보).
이 안단티노를 연주하는 적지 않은 피아니스트들이 페달의 과잉 사용으로 인해 이 왼손의 (약박에 붙은) 스타카토의 느낌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여러분들이 즐겨 듣는 연주도 한 번 주의 깊게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악보에 표기된 이 스타카토를 무시하고서는 곡에 담긴 정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체념, 서러움과 고독이 고통스럽게 뒤범벅되어 있는 이 안단티노의 우울한 느낌은 <겨울나그네>의 마지막 곡인 'Leierman'에서 차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두 곡의 정서가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사실 슈베르트는 'Leierman'에서도 아래와 같은 쉼표 및 악센트의 사용에 의해 (약박에 붙은) 스타카토와 유사한 느낌을 표현했었지요.
결국 그에게 결국 따스한 봄날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매일같이 아프고 힘들지만, 내 음악으로 인해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라는 슈베르트의 말처럼, 그 혹독한 겨울의 차디찬 땅에 그가 묻어놓은 방랑의 노래에서는 해마다 꽃이 피어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토록 짧았던 삶에서 스스로는 평화를 누리지는 못했으나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보내 준 슈베르트에게 그가 듣고 싶어했던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대신 그의 노래 〈연도(Litanaie)(D343)를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