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봉 Jun 18. 2023

쨍하고 해뜰날

드디어 왔다!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에 정권(?)을 빼앗긴 몸과 마음은

무엇에도 신이 나지 않았다.

동전 몇 개 짤랑이며 충무로 골목에 버티고 앉아 아는 얼굴 기다리다

그러다 아무도 안나타나면 맡겨둔 필름이나 찾아 집으로 갔지만

대부분은 누군가 나타나 나와 동기들의 하루에 기름칠을 해주곤 했다.

대학 이름도, 인물도, 몸매도, 옷가지도, 가방도 

뭐 하나 변변치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기대되던 그 날들. 

그때의 나, 지금보다 20년이 뭐냐... 지금 나이의 반타작에도 미치지 못했던 어린 나.

당시에도 알았다.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그리고 나는

살다가 재미가 없어질때나 힘이 빠질 때면

그때 그 시절을 펴보곤 했다. 마치 그러라고 그렇게 재미나게 보냈던 것인냥.   


길어지는 남편과의 침묵,

소소하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아이들과의 마찰,

완연한 아줌마(물론 멋진 아줌마들도 많다. 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모두 모아 놓은 그런 아줌마(였)다)의 모습을 한 무표정한 나의 얼굴,

생각지도 못한 카드 결제일의 등장, 

입금이 늦어지는 알바비,

등을 필두로 케케묵은 고민거리와 걱정거리들이 총출동했다. 


지쳤을까.

권태일까.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외롭지만 그 누구를 만날 여유가 나지 않았다.

엊그제 달력을 보며 날짜를 세어보니

벌써 한달이 넘어가고 있더라. 


내가 마음을 바꾸면 된다. 상대가 어떻든 간에 내가 마음을 바꿔먹으면 된다,

나만 잘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푸시했던 걸까. 

마음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마음에 기대어 있던 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새끼들 밥 먹여 학교에 보내고 

새끼들 데리고 가고 하느라 정신줄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병원에 가봐야 하나, 싶던 찰나

거짓말처럼 쨍해졌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진 건 아니다.

다만 가슴 한쪽에 대각선으로 누워있던 가시 박힌 돌덩이가 사라졌다.

그냥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이유없이 눈물이 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슬프지 않았다. 


이유없이 허기지지도 않다. 


어제 나는 

걷듯이 뛰기를 시작한 나를 위해 운동복을 사주려고 했다. 

그 동안은 그냥 남편 옷으로 몸을 가리고 헬스장에 갔지만, 

내게도 뭔가를 해주려고 살펴봤다. 

그리고 깔끔한 여름 샌들을 찾아봤다. 

50% 이상 할인하는 2가지 종류의 샌들을 골라봤는데

7만원 정도의 가격에 막혀 일단 담아만 두었다. 


설마, 그 물품들을 쇼핑해서 내 기분이 쨍해진 것일까.

심지어 사지도 않았다. 그냥 보기만 한거다.


어찌 되었건

질척거리는 진흙탕에 두 발과 손이 푹 담겨 있던 기분은 지나갔다. 

이제 이 계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한낮 쨍쨍 찌던 땅도 식어 열기 가신 오후 7시 이후.  

가끔은 바람이 불기도 하는데, 

언제까지고 맞고 싶은 바람이다. 뜨거운 여름이 녹아있는 뜨겁지 않은 그 바람.

게다가 날도 아직 밝다. 운수좋게 그 바람을 맞으며 점점 붉어지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여행자라도 된 것 같다. 


아직 오늘 해도 지지 않았지만,

정말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거다.





작가의 이전글 '좋다'와 '싫다'에 속하지도 섞이지도 않는 그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