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커다란 올리브나무만 보면 좋은 화장실이 되겠다는 생각뿐
- 피피는 밭으로 바로 연결되는 중수도 시스템으로 가고, 포포는 저 올리브나무 밑에서 하면 돼.
- (2주의 스테이 후…) 이 화장실이 내 인생 최고의 화장실이야!
까베에서 나오기 전 날 급하게 연락을 했는데 흔쾌히 2주 스테이를 받아준다는 워커웨이 호스트가 있었다. 여행 초반부터 마음이 지친 탓에 그라나다(Granada)에서 3일 정도 쉬고 호스트가 있는 타리파(Tarifa)로 향했다. 타리파는 이베리아 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도시다. 바다 건너 아프리카 대륙의 모로코(Morocco)가 육안으로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리고 호스트 로베에 따르면 카이트 서핑이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그라나다에서 타리파에 가기 위해 우선 알헤시라스(Algeciras)라는 도시로 갔다가 타리파행 버스로 갈아탔다. 직통 버스가 없어 번거롭고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하는 게 낫다. 이럴 때마다 한국의 대중교통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 농장의 봉사자들도 버스를 갈아타고 힘겹게 찾아서 올까 싶은 생각도 들고. 대개 '한국은 기차도 버스도 저렴하고 잘 되어있는 편이지 뭐'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생각이긴 하지만.
스페인 남부의 도시들은 이슬람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사람들도 많이 와서 산다. 하지만 말라가(Málaga)나 근처의 마르베야(Marbella), 푸엔히롤라(Fuengirola), 미하스(Mijas) 같은 도시들에서는 잘 못 느꼈는데, 알헤시라스부터 타리파는 간판에 아랍어가 쓰여있거나 건물들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여기는 모로코 음식이 저렴하려나 생각하면서 버스 밖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타리파에 도착했다. 작은 버스 터미널인 데다가, 주말이라 터미널 내의 작은 카페는 닫았고 티켓 부스도 닫혀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로베가 도착했다. 착해 보이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반가움 가득한 포옹을 나눈 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로베의 빨간색 소형 지프에 짐을 실었다. 해변과 초원, 그리고 그 위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는 말을 보며 20분 정도 달리자 앞으로 우리가 2주 동안 지낼 곳에 도착했다. 오렌지와 귤나무가 가득한 작은 숲을 지나 펼쳐진 풀밭과 올리브나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평화로웠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까베와는 다르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로베는 여기서 퍼머컬쳐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다고 했다. 농장의 이름은 까오띠까 베예사(Caótica Belleza) - 혼돈의 아름다움. 인위적이고 인간 중심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에 해를 가하지 않고 다양성이 넘치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다.
0.5 헥타르 (1,500평) 가량의 부지를 매입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이제 2년이 되었다고 했다. 카이트 서핑을 좋아해서 세계 여행하며 서핑하던 로베는 COVID 시기 타리파에 땅을 샀다. 가족들에게 돈을 빌리고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투자한 결정이었다. 그는 기후위기를 실감하며 자신의 주변에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만드는 데에 진심이었다. 카이트 서핑에 최적화된 기후를 가진 이 도시가 좋아 살게 되었는데, 타리파가 위치한 안달루시아 지역은 최근 몇 년 계속된 산불로 많은 지역이 황폐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더욱더 더워지는 날씨에 물은 점점 마르고 땅은 생물이 살기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 생명력이 풍부한 숲을 다시 만들려는 까오띠까 베예사 프로젝트를 위해 로베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금액을 모을 계획이라고 했다.
플랫폼을 통해서 호스트를 검색하다 보면 호스팅 가능한 인원수를 볼 수 있는데, 로베의 집도 2명이 가능하다 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겨울이라 먹거리가 정원에 많지 않아 1명의 호스트만 받을 수 있지만, 우리 프로필과 메시지가 흥미로워서 숙소는 제공하되 먹거리를 함께 구매할 수 있겠냐고 답장이 왔다. 파스타면, 잡곡류, 향신료, 소금후추, 기름 등은 항상 있으니 마음껏 사용하라고 했다.
로베는 먹거리를 나눠서 구매하는 대신에 일하는 시간을 하루 2시간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덧붙였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도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고 있고, 워커웨이나 우프엔 보통 외국인 호스트가 많은데 스페인인이라 스페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되고, 퍼머컬쳐에 관심도 있다 하니 우리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바로 좋다고 답을 보냈다.
까오띠까 베예사에서 머물며 할 일은 크게 1) 크리스마스 기간에 집을 비우는 로베를 위해 고양이들 돌보기, 2) 하루 두 끼 식사 준비하기, 3) 필요한 날 청소하기, 4) 정원 가꾸기였고, 영어 실력 향상을 원하는 로베를 위해 대화를 전부 영어로 하는 게 규칙이었다. 모든 일을 매일 하는 건 아니고, 내내 청소를 한 날엔 식사는 로베가 준비한다던가 정원 가꾸기를 1시간 한 날은 식사를 한 끼만 준비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숙소 사용 설명서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열하니 많아 보이지만, 보통은 식사 준비가 주요 업무였다. 로베는 리모트 워크를 하는 개발자라서 거의 매일 집에 있었다. 채식주의를 하는 그는 건강을 신경 쓰며 먹고 싶은데 일하면서 요리까지 정성껏 하기가 어려워 워커웨이어를 호스팅 한다고 했다. 나와 온기도 채식주의를 꽤 오랫동안 해왔고, 지금도 집에서는 (가급적) 비건으로 지내기 때문에 채식요리는 자신 있었다.
로베는 아침을 10시쯤 먹고, 점심을 1시나 2시에 먹는다 해서 스케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우리 먹는 시간에 요리를 하고 로베가 먹을 것은 남겨만 놔달라고 했지만, 호스트와 대화를 많이 하는 생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가급적 로베와 식사 시간을 맞췄다. 온기는 메인 메뉴, 나는 샐러드나 곁들임 메뉴를 맡았다. 병아리콩이 많아서 후무스를 만들어 부리또를 만들기도 하고, 으깬 감자를 도우로 쓴 피자를 만들기도 했다.
몇 끼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로베는 메뉴로 밥을 자주 먹는 걸 선호하지 않고 샐러드는 점심에만 먹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워커웨이어로 여행하면서 식사 준비를 주 업무로 했던 적이 없었는데, 주 업무로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먹을 음식만 요리하면 금방 할 텐데, 스테이를 제공하는 호스트에게 해주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담이 컸다. '이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 '이 재료는 오늘은 써야 하는데 어제도 먹어서 싫어하려나?' 같은 고민들에 간단한 메뉴를 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온기는 로베의 반응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는 재료로 만들고픈 채식 요리를 잘만 만들어냈다. 로베는 고민도 많이 하고 시간도 많이 든 내 음식보다 온기의 음식에 거의 항상 반응이 좋았다.
나도 내가 부담 갖지 않고 잘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숙소 사용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했다. 로베의 숙소에는 특별한 화장실이 있어서, 매뉴얼을 통해 사용법과 왜 이런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게 목적이었다. 마침 여행 동안 그림을 많이 그리려고 아이패드를 가져갔고, 화장실을 사용하며 온기와 나 둘 다 만족도가 높아서 매뉴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매뉴얼을 완성하고 나서 로베의 환한 미소를 보니, 요리를 하면서 느꼈던 부담과 어려움들이 다 해소되는 것 같은 기분에 즐거웠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매뉴얼 파일을 열었는데, 다시 봐도 참 귀엽게 잘 만들었다.
로베의 화장실은 두 곳에 나뉘어 있다. 한 곳은 중고 싱크대를 개조한 변기가 있는 소변(피피 - 스페인어로 소변을 피피Pipi라고 한다)만 볼 수 있는 화장실. 물을 내리는 구조가 아니라 볼일을 보면 파이프로 소변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가고, 옆에 달린 샤워기로 소량 물을 뿌려 남은 소변을 흘려보낸다. 그 옆에 있는 손 씻고 양치질할 수 있는 개수대와 옆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샤워실의 물도 결국 같은 파이프를 통해 흘러서 정원 귀퉁이 바닥에 묻힌 파이프로 모인다. 그렇게 소변은 땅으로 흡수되어 액비(액체 비료)의 역할을 한다. 중수도 시설(Grey water system)의 개념을 적용한 화장실이다.
나도 내 집을 갖는다면 꼭 만들고 싶은 구조인데,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따라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활에서 나온 생활용수가 하수처리장으로 흘러가지 않고 바로 내 밭에서 다시 사용된다는 건,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고 내 삶을 더 의식적으로 살게끔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변(포포 - 스페인어로 대변을 포포Popo라고 한다)을 위한 더욱 특별한 화장실이 있다. 까오띠까 베예사에 들어오면 보이는 커다란 올리브나무. 그 아래에서 볼 일을 본다. 예전에 한 자연농 농부의 다큐를 보면서 그가 삽에다가 볼일을 본다는 얘기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나도 그 대단한 방법으로 밖에 변을 처리할 수가 없었다. 나무 아래라고 말했지만,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무 안이라고 해야 할까. 올리브나무는 가지가 아래로 향해있고 무성해서 밖에서 나무 안이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삽 위에 볼일을 보고 사용한 휴지와 흙 조금을 올린다. 그러고는 나무 기둥 옆에 있는 큰 틀에 삽 위의 변과 흙을 털어 넣고, 근처에 쌓여있는 흙을 1/3 삽 가량 추가로 넣으면 끝이다. 냄새도 전혀 안 나고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다. 자연농 농부의 다큐를 볼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야외에서 게다가 삽 위에 변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막상 며칠 하다 보니 어쩐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2주를 지내자 이번 이베리아 생태 여행에서 사용했던, 아니 지금껏 내가 사용한 화장실 중 가장 좋은 화장실로 자리매김했다. 종종 고양이들이 따라와서 구경거리가 되는 건 끝까지 적응되진 않았지만.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온 후, 우리는 우리만의 생태 화장실을 만들어 실험해보고 있다.
까베처럼 대소변 분리되지 않은 방식으로 한 달 가까이 실험해 보다가, 까오띠까 베예사처럼 대소변을 따로 모으고 있다. 우리 소유의 땅이 있다면 중수도 시스템을 집 구조에 넣고, 큰 버드나무를 심어서 포포 화장실로 사용할 텐데. 어차피 시행착오는 겪어야 하니, 지금은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실험하는 걸로 만족한다.
여기서도 고양이들은 화장실 구경에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스페인에서나 한국에서나 참 적응이 되지 않는, 생태 화장실의 유일한 단점이다 :-)
12월 21일
오늘은 날이 정말 좋다. 바다 수영을 하고 싶은데 옷이 마땅치 않아서 내일로 미뤘다. 파도도 어제보다 센 것 같다. 파도 속 물살이들이 바글바글하다. 파도 앞에 앉아있으니 파도가 세게 칠 때 부서진 물방울들이 발에 튄다. 따가운 햇살에 살짝 물방울이 닿아서 기분이 좋다.
앞으로 여기에 며칠간 더 머물면서 하고픈 것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우선 생각나는 건 퍼머컬쳐 교안 만들기랑 책 구매하기, 숙소 안내문 만들기 정도? 이제 가서 밥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은 후무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