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1926~2009)
인류 역사상, 찍히는 사진과 보이는 사진이 제일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돌려보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고르고 골라서 인스타에 올리고. 또, 누군가 남겨놓은 오늘의 스토리와 사진들을 보죠. 저는 디지털카메라와 스마트폰 카메라 세대입니다. 운이 좋게도 9살 이전까지는 필름 카메라 세대에 걸려 있어서, 아주 옛날 필름 사진들은 남아있어요. 범람하는 디지털 사진들 속에서, 필름 사진은 어딘가 특별하고 소중합니다. 가끔 필름 카메라를 찍는 친구들이 많은데, 한정된 사진 개수에서 오는 특별함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현상만 하고 인화는 하지 않습니다. 비싸기도 하고, 특히 얼굴이 나왔을 때 보정할 수가 없다나요?
여기 카메라로 존재를 증명했던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비비안 마이어 (Vivian Maier, 1926-2009) 입니다. 세상에 사진이 알려진 방법도, 그녀의 존재 방식도 미스터리한, 그래서 더 매력적인 사진 작가에요!
비비안 마이어는 1926년 뉴욕에서 태어납니다. 입주 간호사였던 프랑스인 어머니와, 전기기술자인 오스트리아 아버지. 20세기 미국의 전형적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4살에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그녀는 유년시절을 어머니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보내요. 그 당시 코닥 브라우니(Kodak Brownie)라는 상자 모양의 사진기로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25살 뉴욕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후 40년간 사진을 찍어요. 평생 30만 장의 사진을 남겼지만, 죽는 날까지 한 장의 사진을 팔아본 적도, 전시회를 한적도 없으며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불쾌하게 곁눈질하고 있기도 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여성을 찍은 사진이 많아요. 비비안 마이어는 카메라에 사람들, 그들의 '특별한 면’을 담아냈죠.
마이어는 화려함과 빈곤함이 뒤섞인 20세기 시카고의 일상, 사람들을 생생하게 남겨놓았습니다. 위의 사진 세장과 밑의 사진 네 장에서 빈부의 차이가 확연하게, 생생하게 드러나죠.
이 사진들을 처음 보고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20세기 시카고의 빈부격차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남겨놓은 사람이 있다니..! 해서 사진들을 더 찾아다녔습니다. 특권, 젠더,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러면서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사진들이 정말 많아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인화되지도 않은 마이어의 사진은 13만 5천 장!!입니다.
내가 여기, 사진으로 존재한다는 것
마이어의 사진을 더 둘러보면, 셀프 카메라 모드가 없던 시기 스스로를 찍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이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 모습을 사진에 담는데요, 가장 즐겨 사용한 도구는 거울입니다. 요즘 말로 거울 셀카!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를 찍었던 사진은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단순히 특별함을 주고 싶은 요즘 거울 셀카와는 명확히 달라요. 화가들이 그려왔던 자화상과 비슷합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진실'을 담았죠. 저는 그게 마이어의 내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지 여기, 카메라로 내가 존재했다는 걸 남기고 싶은 마음이요.
실제로 그녀는 철저하게 비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타인에게 본명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도 않아요. 남의 집을 전전하며 보모, 간병인 등의 직업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고 부모와는 연을 끊고 평생 미혼으로 살았습니다. 밀린 월세 독촉장이 꽂혀 있던 시카고의 임대 아파트에서, 무연고자로 사망하죠.
때문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상은 모두 달라요. 기억하는 이름도, 나이도, 그녀가 해준 말도 모두 거짓 입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전쟁 중 프랑스에서 망명한 유태인으로, 누군가는 스파이로 기억해요. 이름도 여러 개, 모두 다 가짜! 괴짜의 삶을 살았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사진을 '본질'에 가깝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진정 스파이였던 그저 괴짜 가정부였던,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 카메라를 목에 걸고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남겨놓은 그녀의 본질적 정체! 만 진실인 거죠. 가난하게 태어나, 고독하게 거리의 사람을 찍으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마이어.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존재 위에 덧씌어진 것들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는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마이어가 50년 간 찍은 필름과 사진들은 상자에 담긴 채 유로 창고에 보관됐었습니다. 마이어에겐 그걸 보관해 둘 개인적인 공간이 없었어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조금씩 생기는 돈으로 창고 임대료를 지불했던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임대료가 체납되자 창고 속 물건들은 결국 경매에 붙여져요. 2007년, 부동산 사업가인 존 말루프가 시카고 벼룩시장에서 이 필름 상자들을 400달러, 약 45만 원에 삽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상자들을 방치해 오던 말루프는 2009년 우연히 마이어의 사진을 인화했는데, 거기에 놀라운 사진들이 담겨 있었죠. 충격을 받은 말루프는 모든 필름을 현상하고, 마이어 사진의 진가를 발견해 팔려나갔던 그녀의 필름들을 수집합니다. 몇 장의 사진을 골라 자신의 SNS에 "이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하고 물었죠. 2009년 10월, 플리커 (사진 SNS)에서 그녀의 사진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습니다.
세상이 마이어를 천재라 부르며 찬양하던 그 해, 그녀는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임대아파트에서 사망합니다.
마이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영국, 덴마크, 벨기에 등에서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마이어의 사진은 빠르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언론과 매체에서 주목받죠. 다큐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전 세계에 상영되고, 2015년 최우수 아카데미 다큐멘터리 후보작에 선정되었습니다. 2015년 오스카 상을 받았죠.
마이어 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모두 존 말루프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루프 컬렉션 (Maloof Collection)을 만들어 마이어의 사진과 관련된 모든 전시를 총괄하고 있죠. 왜 천재들은 늘 작품성을 죽은 후에 인정받는 것도 같은지, 마이어의 사진을 보다가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 고흐나 고갱, 모딜리아니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진의 제의적 가치, 할머니의 얼굴
오랜만에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버리려는 책장을 가져와서 같이 닦고, 책들도 자랑하고! 부쩍 흰머리가 많아지셔서, 얼굴을 보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보다 주름도 많아지셨고, 자꾸만 말라가시고, 먹는 약은 점점 많아지셔서 속상한 마음에 옛날 필름 사진을 같이 꺼내 봤어요.
왜 우리는 사진을 찍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을 사진으로 남겨두려고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 언젠가 마지막이 있을 걸 알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남길 때는 풍경이나 사물을 찍을 때와는 다르게 그 사람을 더 신중한 태도로 관찰하게 됩니다. 그 사람을 자세히 남길 수 있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요. 표정이 살아있는 사진, 웃을 때 파이는 주름들 같은 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잘 말해줍니다. 이때 사진은 누군가 '여기 있었음'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음'을 증언하는 제의적 가치를 갖게 되죠.
하지만 요즘 SNS를 보면 사진 속에서 깊은 상처나 아우라를 발견하는 건 점점 희귀해집니다. 거의 없어요. 엄청나게 올라오는 사진들은 욕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약간 전시적 욕망...? 그래서 피로감만 갖게 될 때가 있죠.
최근 읽게 된 책에서 이를 명확히 설명한 구절이 있어 남겨 놓습니다.
사진에서는 전시가치가 제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의 가치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뒤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제의 가치는 최후의 보루로 물러설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그 초창기에 초상 사진이 사진의 중심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이미지의 제의적 가치는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거의 의식적인 행동에서 마지막 도피처를 찾았다. 초기 사진에서 아우라가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사람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표정에서이다.
초기 사진에 나타나는 멜랑콜리하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의 비결은 바로 이러한 아우라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사람의 모습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자 비로소 전시적 가치는 처음으로 제의적 가치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제의적 가치의 마지막 보루는 인간의 얼굴이다! 또 사진의 아우라가 사라진 것은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전시적 가치'가 강해지면서부터다! 명쾌한 통찰입니다. (책 읽는 민지 칭찬해~) 저는 포토샵도, 필터도 없이 찍힌 제 모습을 좋아해요. 온갖 필터와 뽀샵이 넘쳐나는 사진들 속에서 '제의적 가치'가 '전시적 가치'를 넘어선 사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어디선가 "멜랑콜리하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향해 셔터를 누르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다음에 저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할머니와 오이도에 가보려고 합니다!
존 마이어의 사진을 더 보고 싶으신 분들을 요기! 사이트를 추천해요. 그리고 가끔은, 풍경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정 없이 남겨두는 게 어떨까요? 절대 마지막을 알려주지 않는 세상이니까요! 저는 언젠가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