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 비유하면 예술고등학교였던 권번. 이들이 트로트 문화의 출발이었다. 출처 한국문화중앙연구원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
트로트 전성시대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 TV를 틀면 온통 트로트 방송.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트로트 무대에 자주 등장한다. 가끔 초등학생들이 부르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DNA에는 특유의 한(恨의 정서가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트로트가 국악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 그래서 트로트와 국악의 관계를 정리해 보았다.
트로트와 관계가 깊은 민요는?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민요가 있다. 지역에 따른 선율의 특성(토리)에 따라 경기민요(경토리), 남도민요(육자배기), 제주민요(제주토리), 서도민요(수심가토리), 동부민요(메나리토리)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다. 모두 다양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중에서도 경기민요가 트로트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트로트란 단어의 시작은?
트로트의 사전적 의미는 ‘Trot’(트로트)는 “빠르게 간다”, “빠른 걸음으로 뛰다”라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트로트의 기원은 미국의 폭스트롯이라는 춤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폭스트롯은 4/4 박자로 이루어진 기본 4비트 리듬에 추는 춤인데, 그 반주곡을 줄여서 폭스 트롯 또는 폭스(Fox)라고 부른다. 1914년 미국 보드빌 쇼에서 유명 연예인이었던 해리 폭스(Harry Fox)가 처음 고안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회자되고 있는데, 해리 폭스가 순수하게 창작했다기보다는 당시 보드빌 쇼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댄스스텝을 응용한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기원은 둘째치고 이 춤과 춤곡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유행했고, 재즈와 스윙댄스, 블루스, 왈츠, 탱고 등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양하게 분화했다. 1920년도를 배경하는 하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파티에서 폭스트롯을 연주하고 노래에 맞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여배우(캐리멀리건) 춤을 춘다. 그 장면에 나오는 음악과 디카프리오의 춤이 바로 폭스트롯이다.
그렇다면 트로트는 미국 문화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의 한국의 트로트는 완전히 다른 음계와 다른 리듬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K-트로트와 국악의 연결고리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먼저 민요 창법이 돋보이는 가수들의 음악을 들어다 보면 발견이 가능하다. 트로트는 ‘유행가’라는 이름으로 190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서 첫 선을 보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40년대까지 유행가를 부른 가수 상당수는 권번에서 국악을 배운 기생들로, 이들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권번은 지금에 비유하면 예술고등학교와 같은 곳으로 춤과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전문 예술학교. 한국식 트로트의 시초가 바로 이 권번에 다니는 국악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화자, 선우일선, 왕수복, 김복희, 이은파, 장옥조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걸그룹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 시스터즈
이들의 창법을 분석해 본 결과, 우리나라 민요의 밝고 화사한 창법으로 유행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지금의 트로트 속에 많이 녹아들면서 애절하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K-트로트의 계보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본래 국악 리듬은 3박 5박처럼 홀수 박이 많은데, 결국 한국의 민요창법으로 부른 4박자의 서양리듬이 더해져서 지금의 트로트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티브이를 보면 국악인출신의 소리꾼들이 국악창법과 호흡을 트로트에 접목하여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최근 트롯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송가인, 양지은, 김태연, 김다현 씨 등 국악 전공자 출신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1952년 9월9일 한국전쟁 당시 위문 공연을 하는 가수 이난영(위)과 《애수의 소야곡》의 미성 가수 남인수. (오른쪽)우리 가요계 최초의 직업 대중가수이자 스타 채규엽 ⓒ연합뉴스
민요와 트로트의 차이는?
우선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민요는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이나 향토적 삶을 즐겁게 노래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긍정의 가사들이 많다. 모든 곡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기민요 풍년가 같은 경우 가사를 보면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으로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구나 좋아>라는 가사만 봐도 즐거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트로트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시작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처지를 비관하고 스스로 욕망을 꺾고 체념하며 이러한 패배를 자학과 자기 연민의 태도와 감정으로 해소하는 노래가사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 신나는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로트는 대개 매우 애절한 슬픔의 노래가 많고, 대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행복해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고통 등을 내용으로 삼아 진지한 분위기의 곡들이 많았다. 당시 노래제목만 봐도 느낌이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 등 이런 곡들이 대표적인 초창기 트로트 곡은 대부분 슬픈 곡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트로트 오디션의 시작은 1930년. 그 주인공은 타향살이
트로트 오디션의 시작은 무려 1930년대였다.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동아일보의 후원으로 개최한 ‘전국 신인남녀가수 선발대회’가 그 시초였다. 이대회에서 3위로 입상한 ‘고복수’라는 분이 큰 인기를 얻었다. 요즘의 임영웅 씨의 인기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한다.
1930년 대 트로트 오디션에서 팬덤을 일으킨 고복수 선생님의 타향살이
1933년에 서울, 평양, 신의주, 함흥, 원산, 부산, 대구, 군산, 청주 등 열개 도시에서 지역별로 세 명 정도 가수가 뽑힌 뒤, 1934년 2월 서울에서 열린 최종 결선에서 1등 정일경(전남 대표)에 이어 고복수(경남 대표)와 조금자(함북 대표)가 당선되었는데 3등을 했던 고복수 씨는 ‘타향살이’로 벼락스타가 된다.
당시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 작곡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복수의 노래 실력에 “가는 곳마다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어떤 열렬한 여성 팬은 울다가 까무러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극성팬은 혈서로 손수건에 ‘사랑 애(愛)’를 써 보내서 고복수 씨가 질겁한 일도 있었다니, 그 인기와 팬덤이 지금에 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MZ보다 소비력이 높은 중장년 소비 세대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지만 트로트의 부활 역시 오디션이었다. 2019년 미스트롯이 불씨를 붙여 2020년부터 급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김호중 씨를 시작으로 K-POP N 음원차트에 트로트 가수의 곡들이 속속 등장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2022년에는 글로벌 팬덤을 보유한 대형 아이돌 그룹만이 가능한 경지로 여겨지던 밀리언 셀러(Million Seller)를 트로트 가수 임영웅 씨가 달성했다.
이러한 내용이 중요한 이유는 트로트 팬덤은 아이돌 팬덤과 달리 국내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즉 글로벌 확장성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는데, 같은 100만 장이라도 대한민국에서만 팔린 100만 장이기 때문에 팬덤이 더욱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소비되는 트로트 음반들은 MZ세대 중심의 아이돌 팬덤 대비 소비력이 더욱 높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국내 대중음악계의 게임체인저로 등, 음반시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으며 앨범 밖의 영역에서도 대형 아이돌 못지않은 성과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2022년 개최된 첫 투어 ‘아임 히어로(IM HERO)’를 통해 국내에서 26회 공연, 24만 명의 모객을 기록, 회당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객 하는 등, 엄청난 티켓파워를 인증했다. 2023년 3월에는 콘서트 실황 영화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IM HERO THE FINAL)’ 개봉을 통해 25만 명의 모객을 기록하기도 했을 정도로 대중음악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국악인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이렇게 트로트가 대한민국 대중문화를 휘어잡았는데, 국악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오르지 못한 듯하여 아쉬움이 많다. 이러한 트로트의 그 바탕에 우리 음악이 있고, 그 중심에는 국악이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이 많이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