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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영 Jan 05. 2023

"당신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나요?"

감정어휘 - 유선경

 이 모든 것은 '나'의 감정에서 시작됩니다.


 닭이 먼저일까요, 달걀이 먼저일까요. 시작은 ‘꽃’일까요, ‘씨’일까요. 저자는 꽃에서 시작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꽃이 아름다워 우리들의 눈길을 끌기 때문입니다. 눈길이 가면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면 발길이 닿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긍정적인 감정이 그려진다면 접근할 것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그려지면 회피하곤 합니다. 


 취업 같이 중요한 일도 부정적인 감정이 앞서면 핑계를 대며 이력서를 내는 날을 미루곤 합니다. 심지어는 생명과 직결되는 돈과 관련해서도 사람들은 잘못된 걸 알면서 태연하게 필요 없는 것을 소비합니다.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감정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감정은 자극에 대해 마음이 일으키는 반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자극을 느낍니다. 예민한 사람은 자극을 더 강하게 받아들이고 쉽게 피곤해집니다. 우리는 자극을 어떤 식으로 느끼고 받아들일까요. 부정적 감정이 먼저 일어나나요, 긍정적 감정이 먼저 일어나나요, 자극에 대한 우리들이 반응은 따뜻한가요, 차가운가요. 아픈가요 아니면 근질근질한가요. 가벼운가요, 혹은 커다란가요. 여러 가지 어휘들을 찾아서 자신의 감정 상태를 체크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요?


 찰리 채플린이 제작, 감독, 주연을 맡은 영화 <황금광시대>에는 굶주린 찰리 채플린이 우아하게 구두를 삶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 구두를 한 점씩 썰어 입에 넣는 모습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음미하는 귀족 같은 품위마저 느껴집니다. 그러나 촬영을 위해 감초로 만든 구두는 배탈이 날 정도로 맛이 없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은 구두를 입에 넣고 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요.


 사람에게는 저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지하든 못하든 그건 그 사람의 약점이나 상처일 것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세상을 위협적으로 느낍니다. 그들은 상처가 드러나면 잡아먹히거나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등딱지 달팽이처럼 단단한 껍데기로 연약한 속살을 감싸고 느리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등딱지 달팽이들에게 껍데기는 단순히 숨고 잠자는 집이 아닙니다. 심장을 비롯한 주요 장기가 들어 있어 껍데기가 깨지면 죽고 맙니다. 남들 눈에는 고작 껍데기 정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껍데기가 깨지면 죽습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요.  


 옹이는 가지 밑동이 줄기에 파묻혀 박힌 자국입니다.


 옹이가 많은 목재는 다른 목재보다 싸다고 합니다. 가구로 제작했을 때 옹이 때문에 주변이 갈라지거나 구멍이 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옹이가 많은 나무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살아생전 그 나무는 성장하기 위해 가장 노력했던 나무였습니다.


 옹이가 있던 자리에는 본래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끝에는 푸른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려 있었고, 희망을 쬐며 나무를 성장시켰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뻗은 가지가 죽었을 때 나무에는 옹이가 박히고 맙니다. 옹이는 희망이 부러져 몸속에 박힌 흔적입니다. 그래서인지 옹이는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옹이가 내 삶의 무늬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독특한 무늬가 이 세상에서 당신이 유일하게 당신이라는 독립적인 증거가 될 거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마음속에 옹이가 박혀 자신의 가치를 떨어트려도, 무거운 껍데기를 이고 비탈길을 천천히 기어가고 있어도, 비록 타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없더라도.


 혼자 있는 시간만큼은 자신의 무거운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패인 자국이 얼마나 아물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가끔은 타인이 무신경하게 우리의 상처를 들춰내기도 합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때 기쁨을 느끼고 업신여김을 당할 때 수치심을 느낍니다.  존재감을 인정받는 것은 사람이 가진 개인적인 욕구 중 가장 두드러지는 욕구입니다.


 그래서인지 조선 시대에는 팽형이라는 형벌이 존재했습니다. 가마솥에 들어갔다 나오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형벌이었지요. 산 자의 존재감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사회적 사형제도입니다. 그만큼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사소한 이유로 타인을 무시하거나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자신의 힘을 증명하려고, 혹은 두려워서, 혹은 거부당하기 싫어서, 사람은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동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에 비해 가진 게 많다고 느껴졌습니다. 연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약자인 제가 강자들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계발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해 보려고요, 만약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혼자서라도 잘 살 수 있도록.


 "내가 나로서 살아가고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저는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매우 노력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상적인 말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엔 저 혼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제가 한참 뒤처져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예 못할 것 같으면 포기라도 하겠는데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포기도 못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쓰고 싶은 에세이와 시로는 심사를 통과할 수 없어서 서평을 썼습니다. 남들에게 필요한 글을 쓰겠다고, 그걸로 구독자를 모으고 책을 내서 이 플랫폼에 도움이 되겠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붙었습니다. 그래서 붙은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합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뭔가 이루기도 전에 제자리로 돌아오고 맙니다. 저는 많은 것을 시도했지만 하나도 끝을 보지 못했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면 타인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데 상대방의 기준을 맞추기는 싫었고 인정은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고 스스로도 그 헛소리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시작만 반복했습니다. 어쩌면 운 좋게도 제 기준이 상대의 기준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적 같은 상황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면서요. 시작하고 포기하고 또 시작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미적지근한 날들이었습니다.


 감정에도 미지근함이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을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은 채, 나쁘지 않고 악하지 않다는 것을 ‘평안’이라고 포장하며 하루를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실상은 권태로운 무기력의 전조증상이었습니다. 그저 그런 상태로 일상을 보냈습니다. 늘 나쁜 일이 많았어서 그런지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포기하면 편한데 완전히 포기하지도 못하고, 미묘하게 불편해하면서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매일 우울했고 그래서 매일 무기력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돈도 벌지 않고 미래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반년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눈 뜨면 만화를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며 숨만 쉬고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밖에 나가고 싶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니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충분히 쉬면 늘어날 줄 알았던 체력은 오히려 안 움직이는 만큼 줄어들었습니다. 침대에 누워만 있다 보니 방안을 걸으면 숨이 찼습니다. 충분히 먹지 않아 빈혈이 생겼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다 보니 깨달은 사실은, 아무것도 안 하면 정말로 죽어가는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기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런 게 죽음이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뇌가 죽음을 준비하고, 몸은 죽음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게 뭐든 간에 말이에요. 


 말라 붙은 감정을 되살리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요? 저자는 재미와 멋이 필요하다고 서술합니다. 


 그 이후 재밌는 것들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저 재밌는 것들을 쫓아다니는 삶이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약, 술, 담배, 도박, 사람을 재미없다고 느껴서 인생이 상대적으로 덜 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게 재밌었다면 지금쯤 저는 주정뱅이 쾌락 중독자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재미란 무엇일까요?


 재미에는 두 가지 풀이가 있습니다.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좋은 성과나 보람' 


 저는 취미로 이모티콘 그리기. 소설 쓰기, 만화 그리기, 사진 찍기 등 제가 본 세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표현했습니다. 뭔가에 집중할 때 소소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성취는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좀 더 깊은 공부를 해야 할 때가 오면 하기 싫다고 내 안의 어린애가 떼를 썼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취미를 뭐 하러 힘들게 배워가며 하냐고 다른 거나 하자고 징징대곤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약간은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 매일이 슬픈 제가 불쌍하고 가여워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스스로의 인생을 조금 말아먹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위기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걱정하던 최악의 상황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당이야 가능하겠지만 기왕이면 최악보다는 나은 삶을 살아야지" 하던 마음은 제 인생을 천천히 암흑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점점 일할 곳이 줄어들고 짝사랑 상대에게 연거푸 차이면서, 저는 스스로의 가치관이 아주 수준 미달이라는 걸 몸소 체감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래를 상상해야 했습니다. 최악만 아니면 되에서, 적어도 이 정도는 됐으면 좋겠다,라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멋이란 ‘차림새, 행동, 됨됨이가 세련되고 아름다움’이라는 뜻과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라는 뜻이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건 바라지도 않으니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삶이 정갈하고, 필요한 것은 갖되 불필요한 것은 나눌 줄 알며, 안정적이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방을 치우고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뭔가 해결되어 인생이 슬슬 풀려나가야 할 것 같지만 저는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최근 후련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짐이다 못해 죄책감으로 남아 있던 운전면허를 기어이 따냈는데도 전혀 후련하지 않았습니다. 진작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했다는 미묘한 원망과 그래도 뭐라도 하긴 했네, 했으면 됐어,라는 미약한 평가만 남았을 뿐입니다. 도대체 저는 왜 이리 스스로에게 야박한 걸까요. 생각해보면 그건 부모님의 반응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보는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여태 못한 반푼이 자식이었으니까요. 면허를 따라고 돈까지 줬는데 반년이나 걸렸다는 것에 속상해할 것만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최초의 슬픔과 공포를 준 대상은 필연적으로 ‘부모’입니다. 


 우리는 기억 속의 엄마와 화해했을까요? 그렇다면 자신 안의 타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따뜻해져서 타인이 차갑게 굴어도 과하게 슬프거나 절망을 느끼는 빈도가 한결 줄지 모릅니다. 슬픔은 그때 우리가 너무 어렸고 부모도 너무 어렸다는 것에서 옵니다. 그 상황을 이해하지만 용납하지 못하고 사랑하면서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슬픔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정말 용서가 정답인 걸까요? 


 어쩌면 소중한 것이 없다면, 분노와 슬픔도 없을지 않을까요?


 제 경험상 그랬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를 미워해도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힘들었을 일에도 비교적 무덤덤했고 사회에 나가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괜찮았습니다. 선천적인 건지 후천적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저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대접을 받고 싶었지만 그걸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제게 해주지 않는 걸 스스로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게 의미가 있을까. 


 슬픔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슬픔은 좌절된 분노라는 정의에 주목합니다. 사람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을 때 분노하며 희망이 없어 분노조차 표현할 수 없을 때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분노를 동경했습니다. 분노의 다른 표현은 열정이었으므로. 


 사람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존심’입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자존심 보호의 법칙’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표현합니다.


 예전에 허언증이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말로 타인을 속이고 이득을 취하는 모습을 영악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그런 이기적인 행동은 영리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십 년 뒤 모습을 봤을 때 저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그들의 말로는 정말로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떤 것들을 자존심으로 보호하고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지키는 자존심이 정말로 스스로를 위한 건지 가끔 의심하곤 합니다. 제가 지키려는 게 나 자신인지, 허상인지, 정말 지키려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종종 의문을 가집니다.


 감정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의 반응이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다들 감정에 휩쓸려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한 후에 그 행동을 후회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감정이 들이닥칠 때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감정은 나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라고, 그러니 당신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더 행복한 삶을 선택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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