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함께-죄와 벌>을 보고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부심*이 있다. 예컨대 '서울부심'이라고 하면 서울에 살면서 서울 외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행태를 말하고, '언더부심'이라고 하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해야 진정한 랩퍼"라거나 "혁오밴드는 나만 좋아하는 가수였는데, 텔레비전에 나온 뒤 아무나 좋아하게 됐다"는 식이다. 소속이나 취향에 개인적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자부심의 표현이 다른 무언가를 깎아내리는 식으로 나타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된다. 그 때 사람들이 느끼는 아니꼬움이 'OO부심'이라는 조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신과 함께-죄와 벌>을 보면서 '원작 부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부심: 원래는 자부심의 줄임말이나, 주로 거들먹거리는 행태를 조롱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신과 함께-죄와 벌>은 '파괴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를 원작으로 한다.(참고:나무위키 '신과함께')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등 원작을 가지는 영화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원작에 비해~"로 시작되는 평이 따라 붙는다. 이는 다른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떤 콘텐츠가 다른 매체로 옮겨갈 때 원작의 어디까지 충실해야 하는지 궁금증해진다. 캐릭터? 스토리? 세계관? 외모가 닮은 정도?
그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지만, 나는 새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원작을 잘 재현-구현할 뿐만 아니라 부족한 면을 뛰어넘기를 바란다.
특히 같은 매체에서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신과 함께-죄와 벌>처럼 웹툰에서 영화로 가는 경우는 원작 웹툰이 가지는 매체의 한계성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현해주었으면 한다. 흔히 말하는 초월 번역*처럼 말이다.
*초월 번역: 원문의 의도와 미묘한 뉘앙스를 원문보다 더 적절하게 번역한 것.
주호민 작가의 그림체는 아동용 학습만화처럼 단순하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해내기로 유명한데, 아동스러운 그림체 때문에 공포나 액션 만큼은 맥 빠지는 면이 있었다.
오늘 보고온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서는 원작에서 이렇게 맥 빠졌던 원귀(왼쪽)나 지옥귀들, 액션 장면이 고퀄리티 CG로 생동감 넘치게 살아난 것은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왠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모순적인 표현은 내 감정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다.
나는 <신과 함께-죄와 벌>를 보면서 한국전쟁 전후 어느 가족의 역사를 다룬 영화 <국제시장>을 떠올렸다. <신과 함께-죄와 벌>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어머니 혹은 부모님, 가족의 사랑에 대한 영화다. 이것은 신성 불가침한 영역이라서 그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다.
나 역시 <신과 함께-죄와 벌>을 보면서 울 수 밖에 없었다. 억지로 삼키던 눈물이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이 영화는 그렇게 가족이라는, 대개의 사회 구성원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인 내용으로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런데 엉엉 울면서 마음 한 켠에 들어차는 불편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를 보고 나와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딱 하나, <신과 함께>의 주인공인 김자홍이라는 캐릭터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다.
웹툰 <신과 함께>에서 김자홍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큰 죄를 지은 적도, 크게 선행을 베푼 적도 없다. 오히려 너무 평범하게 살아온 나머지 매 재판마다 취준생이 자기소개서를 쓰는 심정으로 인생의 아주 사소한 사건까지 끌어모아 변론을 해야하는 평범한 사람의 표본이다.
웹툰 속 김자홍은 너무 평면적이고 수동적인 인물이라서, 되려 매번 기지를 발휘하여 김자홍을 구해내는 진기한 변호사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웹툰 속 일곱 지옥을 돌아가며 심판을 받는 김자홍에게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나 역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 옆 동네 백수 친구, 고객 접대를 마치고 밤늦게 퇴근하는 사람, 우리 아버지, 동네 카페 사장님까지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이 김자홍이다.
웹툰의 김자홍이 첫 번째 재판에서 덤핑처리 당할 만큼 흔하디 흔한 범인인 반면,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에 김자홍은 19년만에 나타난 귀인이다. 그의 직업은 소방관인데 임무수행 도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소방관이 남을 구하다 죽어 저승에서 귀인 대접을 받는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극단적으로 평범한 웹툰 속 김자홍과는 반대로 영화 속 김자홍은 극적인 죄를 저질렀고, 극적으로 남을 위하는 삶을 살았으며, 장렬하고 정의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속 김자홍은 웹툰의 김자홍보다 훨씬 풍부하다. 그의 굴곡진 역사는 영화의 주인공 자리를 꿰찰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너무나 촘촘히 짜여 있어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나는 그저 스크린 속의 김자홍을 보이고 들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신과 함께-죄와 벌>은 시청각적인 면에서 원작과 내 상상력이 채울 수 없었던 부분을 초월하여 구현해냈다. 그러나 반쯤 쓰여진 종이 같았던 김자홍이라는 캐릭터의 여백마저 꽉 채워버렸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의 원인은 이것이다. 김용화 감독은 <신과 함께>를 영화로 만들면서 관객이 느껴야 할 감정을 가족애와 눈물로 못박았다. 이 보편적인 감동에는 어떠한 판단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아서, 펑펑 울음을 쏟아내고 극장을 나서며 '뭐 먹을까?' 고민하면 그 뿐이다. 영화를 곱씹어볼 질문거리가 없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같은 작품을 보아도 사람마다 심장이 꿈틀대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나의 <신과 함께:지옥편> 감동과 공감의 포인트는 김자홍이라는 평범한 인물이었는데, 김용화 감독은 아니었나 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오늘 꼴사나운 원작 부심을 부릴 수 밖에 없겠다.
"펑펑 울고나면 그만. 원작에 비해~조금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