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와 2주간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고, 지금 그 여정이 막 시작되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엄마는 우리의 여행보다는 아빠와 동생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 내심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엄마와의 첫 유럽 장기여행에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근 한 달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나의 스타일이었더라면 숙소와 장거리 이동 같은 필수 예약 코스만 예약을 완료해두었을 텐데, 엄마와 여행을 가려니 시내 교통편, 관광명소 입장 등 좀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다. 숙소도 그 전에는 저렴한 곳 위주로 예약을 했었다면, 엄마와의 여행에서는 숙소의 컨디션이나 위치 등 보다 세심한 결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엄마는 우리의 여행이 아니라 집에 남겨두고 가는 가족의 식사, 빨래와 같은 집안일만 걱정하고 계신 게 아닌가.(이전 글 '엄마가 유럽여행을 가면?' 참고 부탁드립니다^^)
나는 내심 엄마는 여행보다도 집안일에만 관심이 있으시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국 전날 엄마 댁에 와서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반전은 일단 내가 보내드린 유튜브와 파리 여행책자를 보시고는 핸드폰에 붙여놓으신 포스트잇
프랑스인들은 자국어로 인사해주는 것을 좋아한다는 내용을 보시고 핵심만 요약해두신 것이다. 난 이 포스트잇을 보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영어 한마디 안 해보셨을 것 같은 우리 엄마이지만 현지 언어도 사용해보고 문화도 경험해보고 싶으셨구나, 여행에 관심이 없으셨던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얘기하기가 어려우셨던 것뿐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출국 전날 짐을 싸는 것에서부터 엄마와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엄마는 짐의 부피나 무게를 줄일 필요성을 나만큼 크게 느끼지는 않으시는 듯했다. 짐이 많으면 장기여행에서는 너무 힘들어지기에 나는 짐을 가능한 한 적게 가져가고자 하는 스타일이었고, 엄마는 그래도 최소한의 것들은 챙겨가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최대한 타협점을 찾아 짐 싸기를 장장 몇 시간에 걸쳐 완료하였다. 그렇지만 일치했던 생각은 소매치기 예방을 위한 철저한 대비. 엄마의 크로스백에는 이미 모든 지퍼에 클립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곧 내 크로스백도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다음 날 여행 당일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사전에 체크인까지 마쳐 E-티켓만 소지하고 있었다. 캡처본도 된다길래 굳이 종이티켓을 발권할 필요성을 못 느껴 엄마에게 E-티켓을 전송해드렸다. 이 바코드 보여주면 된다고 말씀드린 뒤 내가 먼저 출국장을 통과하고 나서 뒤따라 오신 엄마가 내심 뿌듯해하시며 하신 말씀.
"핸드폰 하고 여권 들고 가니까 티켓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나이 든 사람이라 모바일 이런 거 쓸 줄 모른다고 생각했나 봐~"
그리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쭉 살펴보시고는
"사람들 다 종이티켓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모바일로 했네."라고 하신다.
출국심사장에서도 대면 심사대가 아니라 자동출국심사대로 배정받게 되었다.
"어머나, 나 이런 거 안 해봤는데 어떡해."라고 말씀하시며 돋보기를 꺼내 드신다.
"내가 바로 옆에서 할 테니 걱정 마."
여권을 스캔하고 지문을 찍으며 옆에 계신 엄마를 흘끗 보니 기계에 표출된 안내대로 잘 따라 하고 계신다. 드디어 면세점이 있는 게이트장까지 빠져나온 뒤에야 안도하신다."요새는 다 자동으로 하네. 이런 것도 해봐야 하지, 안 해보면 못 하겠어. 막상 해보니 별 것 아닌데 말이야."
비행기에 탑승한 뒤 현지 유심으로 갈아 끼우고 있는데 엄마가 돋보기를 쓰시고는 유심히 내가 유심 갈아 끼우는 것을 쳐다보신다. 왜 그러시냐고 물어보니 나중에 아빠랑 여행 가려면 알아두셔야 하신단다. 기계와 관련된 건 모두 아빠 담당이었는데, 엄마도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실 줄이야.
그러고 나서는 좌석 뒤 모니터로 좋아하실만한 영화를 틀어드렸는데, 엄마가 놀라시는 게 아닌가.
"어머 이거 이렇게 영화도 나오고, 예능프로그램도 나오고?"
일전에 아빠와 유럽여행 가실 때는 할 줄 몰라서 못 해보고 가셨었단다. 게다가 외항기여서 승무원에게 물어보지도 못하셨었을 것이다. 그동안 엄마와의 여행은 전부 기내에 모니터가 없던 근거리 여정이었어서 작동법을 알려드릴 기회가 없었나 보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이 엄마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응, 엄마 이거 이렇게 하면 비행거리도 나오고, 남은 시간도 나오고 그래."
그러면서 전원, 밝기, 음량 조절 등 이것저것 알려드렸더니 매우 주의깊게 들으시고는 곧잘 활용하셨다. 역시 우리 엄마.
기내식이 나오자 기내식 사진도 찍으시는 우리 엄마, 참 귀엽다! 남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더니 기내식에도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가족들 입에 들어가는 것만 온종일 챙기시는 우리 엄마, 2주간 가족들 밥 걱정하지 않고, 남이 해주는 밥만 행복하게 드시고 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