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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Jul 21. 2023

자작나무 숲에 누워

-작별인사(김영하)를 읽고-

  나의 두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볼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여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죽음, 이 두 글자만으로도 이 글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지리라. 하지만 본 작품인 작별 인사는 한 개인과 인류의 마지막을 그리고 있다. '머지않아 너는 모두를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라는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가인 마르쿠스의 명언을 작품 서두에 적어놓은 것만 봐도 그렇다. 고로 본 독후감에서는 종착역을 향하는 곳곳에 세워놓은 이정표 같은 죽음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공허와도 같은 죽음을 직시해 보자.
  본격적인 소설의 시작은 철이가 죽은 직박구리를 묻어주던 날 시작한다. 나도 중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아이와 길에 죽어 있는 강아지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로드킬을 당한 모양이었다. 죽음을 목도했던 적은 생애 처음이었다. 외면하고자 했던 나와는 달리 여자아이는 이름 모를 강아지를 묻어주고파했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더욱 열심히 양지바른 곳을 찾아 땅을 팠다. 나의 부끄러움은 여자아이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강아지를 향한 것이었을까?
  철(哲) 이의 첫 번째 육신과의 작별이 가까워오는 어느 날, 선이와 달마가 하던 토론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억울한 죽음을 당한 민(民) 이를 다시 살려내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다. 때문에 달마는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완전한 무를 최고로 친다. 반면 선(善) 이는 이미 삶을 살고 있는 세상에 발붙인 모든 이들에게 집중한다. 이미 삶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면 삶이든 죽음이든 그 모두를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버지가 영면하시고 나서 100일 뒤에 땅에 묻히셨다. 나는 눈물로 시야를 흐리게 할 수 없었다. 선이의 주장은 매장의 과정을 단 한순간도 외면할 수 없던 그때의 나를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삶에 거대한 부분을 차지했던 이를 잃을 때 자신의 삶보다 큰 의미가 된다. 철이 아빠의 추했던 마지막은 철이의 독립으로 대표되는 상실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다. 소중한 무언가의 상실과 마주하는 일이 이토록 중요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시간이 약이고, 모르는 게 약이라면 현재는 질병이고 안다는 건 상처일 뿐이다. 아차차, 이는 삶을 긍정하지 않는 달마의 주장과 다름없잖은가. 도돌이표가 될 수는 없다.
  철이가 두 번째 육신으로 선이와 재회하여 그녀의 임종을 지키는 장면이 아름답다. 빨강머리 엔처럼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 보기.' 수년 전 급격히 시력이 흐려지기 시작했을 때 죽음이 나의 가까이에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구체적인 어느 날짜가 알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날짜가 가까운 어느 날, 우연히 세월호에서의 현장 영상을 접했다. 듣기만 했음에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스스로 정해놓은 기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지 살고 싶어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나를 깨워 주었다. 나는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뒤늦은 애도로 삶을 축여갔다.

좌로 기운 하늘에 살고 싶다고
기도하는 너에게 움직이지 말고 안심하라고
마지막일지도 모르기에 사랑한다고
울먹이는 그 맘 숨길 수 없는 고백을 기억하려고
덕분에 다시금 살아낼 나에게
결코 잊어질 리 없을 그 세월에
시들지 않을 노란 꽃을 띄우네.”

  언젠가 나 역시 철이처럼 자작나무 숲에 누워 허공을 응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면 한 개의 짧은 삶에서 실명을 전후로 두 개의 인생이 있었다고 초연할 수 있을까? 다른 이들의 죽음은 쉬이 삶의 의미로 받아들였으면서 정작 나의 죽음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는 아직 상상조차 두렵다. 내가 모두를 잊고 모두가 나를 잊는, 나만이 없는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미리부터 알고자 집착할 필요는 없으리라. 삶을 끈질기게 영속하다 보면 그 종착역은 정해져 있다. 다만 먼 훗날이기를 바라는 그날, 의연하게 눈을 감을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 글을 줄이기 전에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 특히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한 모든 죽음에 깊은 애도를 밝혀야 하리라. 지금까지 적어왔던 어떤 글보다 적나라했던 만큼 겨우 묻어두었던 누군가의 슬픔을 가벼이 하려는 의도로 보일까 걱정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글보다 치유가 된 것도 사실이다. 강요될 수 없을 오롯이 나의 감정인 기록을 남기는 의미 따위 없어도 좋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죽어진 이들의 뉴스가 쉬이 휘발되지 않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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