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의「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written by 이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다룬 여러 작품들이 그리는 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모든 문명이 붕괴된 세계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가 절망의 세계인지, 혹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인지는 각각의 상상에서 다르게 펼쳐질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인류의 생존 여부다. 멸망 이후 얼만큼의 인류가 살아남을 것이며, 어떤 새로운 규범 아래에서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지금 수준의 문명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작품들에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많은 작품들이 저마다의 결론을 이야기했다. 아직 아포칼립스를 맞이하지 않은 우리는 이 상상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상을 미리 걸어보면서 지금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고 또 새로운 인간상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생각할 지점들을 주는지 읽어낼 수 있다.
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잘 달라붙는 장르가 바로 SF다. 인류의 문명을 최고의 지점으로 이끌어준 과학기술은 동시에 우리의 멸망을 가지고 올 도구이기도 하다. SF를 다룬 작품들은 많지만 최근 들어 한국 SF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 중에서도 젊은 독자들에게서 많은 관심을 받고있는 김초엽 작가가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보였다.
「지구 끝의 온실」은 나노 기술을 연구하던 연구소의 실수로 생긴 더스트라는 재난으로 많은 인간들이 죽은 후, 많은 시간이 지나 이를 해결하고 재건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식물학자 아영은 해월시에 집단적으로 자란 식물종 ‘모스바나’를 조사하게 되고, 이 식물이 어릴 적 보았던 식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흥미를 갖고 깊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아영은 모스바나를 알아갈수록 그동안 알려지지 못한 모스바나의 탄생 이야기, 즉 더스트 시대의 이야기 속에 묻힌 진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은 조작된 새로운 식물종, ‘모스바나’다. 모스바나는 사이보그 레이첼이 더스트의 해결방안을 원하는 지수를 위해 만들어 냈다. 모스바나는 프림 빌리지를 더스트 폭풍으로부터 지켜냈고, 이후 마을 사람들의 손으로 전세계의 퍼져 더스트의 대량 감소를 이뤄냈다. 이 1차 감소는 이후 더스트를 완전히 해결한 디스 어셈블러 프로젝트로 이뤄낸 더스트 2차 감소의 초석이 되었다. 이 1차 감소는 지수에 대한 레이첼의 애정, 더스트 시대에 프림 빌리지에서 보냈던 안온한 삶에 대한 기억으로 전 세계 곳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스바나를 퍼트려 만들어낸 기적이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만들어낸 재앙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해결한 것이다.
결국 한 번의 종말의 위기가 있었으나 인간의 문명은 살아남았다. 더스트 해결의 키를 인간의 ‘마음’인 이상, 예견된 결말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대다수 남았다하더라도 인류의 시간은 지속되었다. 후세대인 아영은 태어나 대학에도 들어갔다. 더스트가 남긴 상처와 몇몇의 변화들만 제외하면, 이 재건된 세상은 그 전과는 겉모양만 다를 뿐 이전의 세상과 거의 동일한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전히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한 사회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고, 식물은 공존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연구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모스바나를 만들어낸 당사자는 사이보그인 레이첼이었지만 지수를 위해 만들어낸 식물이므로 재건된 세상은 자연히 사이보그가 아닌 인간인 지수가 바랐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이 세계는 유효한 세계일까. 재건된 세계를 보고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이 소설은 아포칼립스의 위기 이후에도 인간 지배적인 세상으로 미래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휴머니즘이 낡은 사상이 된 세상일 때 우리에게 유효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의 기후위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아포칼립스의 시작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은 오만일 수밖에 없다. 다른 종도 멸종의 위협으로 몰아넣은 인간들에게 이전 인간 지배적 사상의 반복은 없어야 하며, 이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전환점을 맞이한 인간들이 살아가고 싶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사이보그, 식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야기 대상의 범위가 넓은데도 불구하고 그 결론이 인류의 재건으로 닿아있어 매우 아쉽게 느껴진다. 적어도 더스트 이후의 세상은 사이보그와 식물들이 인간들과 밀접하게 닿아있어야 하지않았을까.
이 소설이 인간, 식물, 사이보그 간의 교류를 다루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인류의 재건의 바탕으로 사람의 마음의 온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온기는 사이보그와도, 식물들과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이보그와 레이첼의 애정, 식물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는 레이첼과 아영, 그리고 프림 빌리지를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 다양한 온기들이 이 소설을 끌어가는 미약하지만 끈끈한 힘이다. 그래서 더욱 아쉽게 다가온다. 그 기적을 일으킬 정도의 온기라면, 다같이 공존할 세상을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 식물은 더욱 우리의 곁에 당연하듯 있을 수 있고, 사이보그는 인간들 사이에서 고립되지 않을 수 있는 세상. 당장은 상상이 가지 않지만 상상력의 힘으로 전혀 그려보지 못할 미래는 아니다.
SF는 충분히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를 연결해줄 힘을 갖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도의 과학기술은 인간 중심 사상을 해체하고 있고, 인간과 다른 종들을 동일 선상에 놓게 한다. 우리는 이미 인류의 끝을 경험하고 있다. 인간 문명의 발달을 최고로 이뤄내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만으로 살아가지 못함을 깨닫고 있다. 그렇다면, 전환이 필요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 전환의 가능성을 크게, 그리고 다양하게 그린다. 만약 그 가능성을 SF과 인간의 따스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작가는 훨씬 큰 세상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비정하고 이기적인 세태에서 인간의 따스함을 찾자라는 기획으로만 그치기에는 우리는 종말을 코앞에 앞두고 있다.
아트비 문화예술 글쓰기 모임
글쓴이 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