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선배가 와인에 김치를 먹는다
일본 드라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자면 ‘죠시카이’(女子会) 장면이다. 현실에선 두문불출이 특기이지만 왠지 드라마에서는 왁자지껄 떠들며 맛있는 걸 먹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즐겁다. 좋아하는 일본 배우를 고르자면 나가노 메이를 가장 좋아한다. 나가노 메이가 연기한 ‘절반, 푸르다’의 스즈메를 생각하면 아직도 찡하다.
드라마 하코즈메는 나가노 메이 주연이면서 죠시카이 장면이 잔뜩 나오는 드라마이다. 안 볼 이유가 없는 드라마란 뜻이다. 한 편 한 편 보기에는 참을성이 안 따라 줄 것 같아 종영하기까지 힘겹게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나가노 메이의 역할 카와이 마이는 안정적이기 때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경찰이 된 사회초년생이다. '사초년’이라면 한 번 쯤 하는 경험이 있다. 첫 직장과 갖고 있던 기대와의 괴리. 카와이 역시 생각과는 달랐던 파출소 업무에 퇴사하기로 마음 먹는다. 이때 에이스 형사 출신 후지 세이코(토다 에리카)가 모종의 이유로 파출소로 좌천돼 온 후 이 둘의 멘토-멘티 연대(連帶)를 다룬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코즈메는 나가노 메이와 토다 에리카의 케미가 돋보이는 드라마이다. 실제 드라마에서도 카와이가 후지의 ‘덕후’처럼 나온다. 단숨에 후지의 장점 다섯 가지를 말하는 신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명감 없이 일하기 힘든 직장에서 카와이가 방황할 때 같은 여성으로서 롤모델이자 사수의 역할을 해준 사람이 후지이다. 이런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죠시카이’ 장면이다.
하코즈메에서는 죠시카이 장면 한 회에 한 씬 이상 꼭 나온다. 깊어지는 신뢰와 동료애를 나타내기 위해 필수로 거쳐가는 장면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후지가 김치를 안주로 와인을 마시는 지점이다. 일본에선 김치를 그렇게 먹나 싶었는데 카와이 역시 극 중에서 의아해하는 모습이다. 물론 카와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후지 선배이기 때문에 그런 특이 식성쯤 상관없을 것이다.
후지와 카와이의 관계성은 이 와인 – 김치와 닮았다. 사수 - 부사수, 상사 – 부하직원 하면 으레 불편하고 어색한 느낌이다. 요령 없고 실수가 잦은 사회초년생과 바빠 죽겠는데 신입 케어까지 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실무자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후지와 카와이의 관계는 판타지에 가깝다. 현실에는 없지만 신입사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로맨스 판타지이다.
죠시카이 장면 자체를 놓고 봐도 그렇다. 현실에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회식이겠지만 드라마에선 푸념을 들으며 서로를 위로해주는 시간이다. 사실 드라마를 보기 전 토다 에리카가 맡은 후지 캐릭터의 성격이 차갑고 무서울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실제론 이끌어주는 선배와 살가운 후배라니!
나 역시 사회초년생으로서 카와이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며 드라마를 봤다. 직무는 생각과 너무 다르고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되나 싶은 순간의 연속이다. 처음이라 요령이 없고 손도 느리다. 하루에 실수가 딱 하나 뿐이라면 다행.
하코즈메가 신입사원의 고초만 잔뜩 보여주는 드라마였다면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아직 일에 있어 어리바리한 카와이지만 그를 둘러 싼 사람들이 숨통을 트여준다. 카와이가 실수하면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알려줄 뿐 그 어떤 탓을 하지 않는다. 직종에 있어 여성으로서의 고초를 미리 깨닫고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카와이 역시 그에 동화돼 사표는 접어두고 자신만의 사명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경찰로서 처음 발을 내딛은 카와이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 덕분이다.
카와이 같은 후배에서 후지이 같은 선배가 되길 그리고 다같이 죠시카이를 열 수 있길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