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어떻게 인간을 재기능화 시키는가
생성 AI와 LLM이라는 제5의 물결이 왔다.
OpenAI의 ChatGPT가 불러일으킨 LLM 열풍은 단순한 열풍이 아니었다. 광범위한 쿼리 및 프롬프트에 대해 사람과 같은 응답을 생성할 수 있는 이 기술의 등장은, 지난 물결들과 같이 우리 삶을 파괴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이 재기능화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거 연산을 주판으로 수행하던 시절에는 암산 기능이 중요했다. 암산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주판을 다룰 수 있는 능력에 차이를 가져왔다. 그러나 계산기의 등장으로 암산 능력이 무의미해졌다.
오히려 계산기에 숫자를 틀리지 않게 입력하는 손꾸락이 더 중요해졌달까. 다만 선형적인 연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이 선형 연산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뒤이어 엑셀이 등장하였고, 정확하게 숫자를 기입하는 능력은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데이터’의 기록은 자동화되었고, 인간은 이제 단순한 1차원 연산을 넘어 2차원 데이터에 대한 연산이 가능해졌다. 그렇기에 이 2차원 데이터에 대한 연산을 바탕으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은 더더욱 중요해졌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을 또 재기능화하였다.
이제 2차원을 넘은 n차원의 텐서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담겨있는 현상은 인간의 두뇌로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인공지능은 복잡한 규칙을 가진 현상을 학습함으로써 현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패턴을 파악하고 그러한 패턴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어떻게 하면 세상을 잘 임베딩할 수 있을지의 입력 능력과 인공지능이 학습한 패턴을 어디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적용 능력이 중요해졌다.
생성 AI와 LLM이 입력받은 프롬프트에 따라 텍스트, 오디오,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를 출력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인가를 작성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것이 문단이든, 코드이든, 그림이든, 컴퓨터그래픽이든 간에 AI는 초안을 작성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무엇인가의 초안을 작성하는 능력은 실기되었다.
인간에게는 이제 원하는 문제에 대한 초안을 얻을 수 있도록 요구하는 프롬프트 작성 능력과 AI가 초안으로써 생설한 이미지/말뭉치/코드를 문제에 맞게 편집/재구성/디버깅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초기 인공지능의 발전을 보고 사람들은 단순 반복, 단순 응대 직무가 대체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지식인들의 자만이었다. 어느덧 만곡점에 이른 언어모델의 발전을 보면 이들이 가장 잘하는 것은 거대한 지식을 사전에 학습(pre-train)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꺼내오는(retrieval) 일들이었다.
변호사, 회계사, 약사, 의사와 같이 거대한 학문을 머릿속에 넣고 빠르고 정확하게 꺼내는 것을 시험하는 방식으로 자격증을 취득하는 직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정보들을 취합하고 정리하여 현재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는 RA와 같은 직군.
이와 같은 직군들에서 자격이 없는 누군가가 재기능화를 통해 사전에 의학, 법학, 약학을 학습한 모델이 생성한 결과를 그럴듯하게 편집할 수 있게 된다면? 그 결과가 해당 직군들이 낼 수 있는 표준을 상회하는 결과라면?
다만 이것은 ‘일’의 측면이고 ’힘‘과 ’권력‘의 측면에서의 고려는 아니기 때문에 대체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일만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공지능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기능의 대체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기능이 오히려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산보다 적용이 더 고도화된 능력이듯,
생성보다 편집이 더 고도화된 능력이라고 생각하며, 문제를 정의하고 적절한 해결법을 연결할 수 있는 창의력은 할머니댁 인삼주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가 올라갈 것으로 본다.
따라서 틱톡 릴스와 같은 더 짧은 숏폼 콘텐츠들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지만, 시대를 역행하여 책과 같은 롱폼 콘텐츠의 진득한 감상이 재기능화에 유리해 보인다.
책을 읽으며 자신만의 논리체계를 정립하고 사고를 연결하는 힘을 기르는 것은 일은 변화와 관계없이 중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