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자본주의
지난 8월, 신풍역에서 오랜만에 만취했다.
다행히 집에는 잘 들어갔으나, 다음날 일어나 보니 카톡 상단에 연락하던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모티콘 러시를 했더라.
하지만 무엇보다 뼈아픈 것은 에어팟프로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마침 에어팟프로 1세대를 2년 넘게 썼었던 차라 이참에 2세대를 구매하기로 쿨하게 마음먹었다.
쿠팡에 검색했다.
새 상품은 30만 원이 넘더라. 쓰바 무슨 이어폰이 하나에 35라니. 이전에 아이패드도 당근에서 미개봉 새 상품을 구매했고, 아직까지 잘 쓰고 있기에 당근으로 향했다. 25부터 30까지 시세가 다양했다. 미개봉 새 상품인데 너무 싼 건 분명 하자가 있을 듯싶었다. 키워드 알림을 걸어두고 27-28 정도의 물건을 노려봤다.
분실한 줄 알고 재구매했는데 집안에서 찾았다는 사연으로, 27만 3천 원에 미개봉 새 상품, 애케플도 가입되어 있으며, 심지어 택배 상자 그대로 양도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바로 접선했고, 거래를 약속했다.
판매자는 몽골 여행을 앞두고 있어 택배가 오더라도 바로 확인 후 입금이 불가능하다는 내 사정을 이해해 주셨고, 몽골에서 돌아와서 입금해 드린다고 약조했다.
상품은 여행 전에 왔고 물건을 확인했음에도 입금을 깜빡했다. 그러나 판매자는 날 독촉하지 않았다. 이 퍽퍽한 세상, 너그러우신 분인가 보다 했다. 감사한 마음에 생각이 나자마자 바로 입금드렸다.
개봉 당시 이상이 없었다.
앱등이로서 수많은 씰을 개봉해 왔던 나도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뚜껑을 열자 아이폰과의 연결 추천 인터페이스는 물론, 일련번호, 애케플 보증까지 아무 문제없었다. 역시 믿고 사는 당근 미개봉 새 상품이라고 자위하며 안도했다.
사용 후 한 달이 지났을까 사소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어느 순간 방지턱을 지날 때마다 그 진동 그대로 음질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냥 외부환경을 반영하나 보다 하고 넘어갔다. 이후에는 가끔씩 뚜껑을 닫아도 연결이 유지되거나, 분명 풀충전을 했는데 금방 배터리가 닳거나 했다. 이상했지만 그런가 보다 했다. 클레임 하기 귀찮았다.
그리고 오늘 케이스를 빼다가 뚜껑이 분리되었다. 이제야 때가 왔구나 싶어 애플 강남점으로 수리를 받으러 갔다. 지금까지 있었던 결함들과 오늘 있던 일을 설명하며 리퍼를 받고 싶다고 테크니션 분께 수줍게 말했다.
가품이라더라.
같은 시리얼 넘버로 유통된 가품이었고,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제품이라 초기 몇 사람에게는 리퍼까지 해줬다더라. 같은 시리얼 넘버로 리퍼 및 수리 요청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확인해 보니 가품이었기에, 수리 및 서비스가 중단된 상태라고 하더라.
허탈해하는 날 보며 테크니션분께서는 등을 두드려 주셨고, 혹시 내 애플 라이프에 지장이 갈 수 있으니 서비스 기록은 삭제해 주시겠다고 했다.
__
그리고 집에 오는 길이다.
자본주의는 정말 차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