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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time Reviewer Nov 04. 2023

걸어서 2호선 일주 리뷰

2호선, 총 44개의 역, 도합 55km를 따라 한 바퀴

예전에 지식채널-e에서 ‘3의 법칙’을 다룬 적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한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손으로 가리키며 올려다볼 때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그 숫자가 세 명으로 늘어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하늘에 꿀단지가 있는 것 마냥 하늘을 열심히 바라보게 되는 현상이다.


한두 명일 때는 쉽게 무시되지만, 매직 넘버 3이 완성되면 함께하는 비율이 늘어나 급기야 상황을 바꾸는 힘이 생긴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이 ‘3의 법칙’은 남자 놈들 톡방에서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무리 개 같은 아이디어라도 각자가 쫄았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객기 기관차는 출발해 버린다. 이 2호선 일주 역시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발단은 2호선 일주가 결혼 전 버킷리스트라는 내년 10월 결혼을 앞둔 한 남자의 제안이었다.

혼자서 미친 제안을 하면 아예 무시당하며 둘이서 미친 제안을 하면 븅신들이라고 멸시받지만, 세명, 즉 매직넘버 3이 완성되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생겨버린다. 아무리 병신 같은 생각이더라도 세 명이 완성되면 나머지의 관심을 끌게 되고 결국 그 행동에 동참하게 만든다. 모두가 여전히 븅신 같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빠지면 소외당하는 느낌, 왠지 모르게 하고 싶은 느낌을 받게 되며 하나둘씩 참여 의사를 밝힌다.


그리고 이 말 같지도 않은 1박 2일 2호선 일주를, 그렇게 6명이 출발하게 되었다.




44개의 역, 55km에 달하는 2호선 일주가 주가 아니라, 이 바보 같은 계획에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이 주가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6명의 준비 상태는 정말 개판이었다.


본인은 반스 밖에 없기에 가지고 있는 신발 중 우포스 쓰레빠가 가장 편하다며 그냥 슬리퍼를 신고 온 샛기,

여자친구를 집으로 불러 놓고 여자친구가 잠에 든 사이에 나와 크록스를 신고 온 샛기,

예비군이 끝나고 바로 와서 군복에 군화를 신고 온 샛기,

강남/건대에서 예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바로 헌팅을 할 기세로 멋 부리고 온 샛기까지.

제안자와 나를 제외하고 55km를 걷기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고 온 샛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다들 자신만만해하는 게 어이없었다.


낙오하게 될 경우 나머지 5인에게 풀스윙 싸커킥을 맞자는 결의에도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으며, 절대 자기는 첫 번째 낙오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 다들 자신했다. 나는 쓰레빠와 크록스 비호감 듀오에게 진짜 세게 찰거니까 맞아도 찍소리 하지 말라 경고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시작부터 어지러웠다. 금요일 저녁 8시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2호선 일주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대입구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일주를 시작했는데, 이 개비호감샛기들은 삼성역쯤을 지나자 찡찡거리기 시작했고, 잠실철교를 넘을 때부터는 슬슬 낙오 가능성을 내비쳤다. 건대입구에 도착했을 때에는 크록스 신은 샛기가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며 하도 징징거리기에 내 신발로 바꿔주었다. 우포스 쓰레빠남은 성수에 살았기에 본인의 실수였음을 시원하게 인정하고 신발로 갈아 신으러 집에 다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징징거림을 계속되었고, 결국 DDP역에 도착한 새벽 4시쯤 그중 3명이 떨어져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싸커킥을 날리고 싶었으나, 응징하고 싶은 마음보다 내 다리가 더 소중했기에 그냥 보내줬다. 신발을 갈아 신은 우포스남은 이대까지는 절뚝거리며 함께했으나 신촌 가는 길에 결국 낙오를 선언했다.


남은 우리 둘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당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오른쪽 오금이, 예비신랑은 왼쪽 무릎이 나가 절뚝거렸다. 걸을 때는 그냥저냥 걸을만했는데, 신호에 걸려 멈추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신도림에서 대림으로 가는 코스에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데 마음이 조나 꺾였다.



혼자였으면 해내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이 병신 같은 걸 같이하는 다른 병신이 있기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신림에 거의 다 와서야 비로소 고통보다 완주가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더 커졌고, 봉천을 지날 때는 뜨거운 포옹과 함께 거의 딥키스를 하며, 서로를 참 괜찮은 녀석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토요일 오전 9시쯤 서울대입구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2호선을 한 바퀴 돈 것이다.

엄청나게 뿌듯했다. 근 2년간 느껴보지 못한 성취감이 밀려들어왔다.




처음엔 븅신 같다고 생각했으나, 이 2호선 일주,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강남, 잠실, 성수, 을지로, 신촌, 신도림 등 2호선이 서울 주요 거점을 지나기 때문에 볼거리가 풍성하다.


저녁에 출발하여 반시계방향으로 돌게 되면 강남/잠실/성수의 야경을 만끽할 수 있다. 잠실 철교를 건너다가 시선을 잠깐 옆으로 돌리면 보이는 서울의 밤은 일품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걷다 보면 해가 떠오를 때 즈음 양화대교에 도착할 수 있는데, 다리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 역시 장관이었다. 떠오르는 해 사이를 가르는 당산 철교와 그 위를 부지런히 달리며 아침을 여는 2호선이 정말 아름다웠다.


여행은 멀리 있지 않다.

매일같이 타는 일상적인 2호선도 이렇게 걸어버리면 일상이 아닌, 여행이 되더라.

그러니 이번 주말, 한쪽 다리를 포기하더라도 2호선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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