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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time Reviewer Dec 04. 202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 답지 않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하루키의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던 건 2009년, 16살 때.

당시 <1Q84>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책을 정말 좋아하던 나는 <1Q84>를 통해 하루키의 소설에 입문하였다. 당시에는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한창 성에 관심이 많던 청소년에게 섹스를 야설 수준으로 묘사하던 하루키의 글이 참 맛있었던 것 같다.


당시 친구 애송이들과 친구 어머니 주민번호로 공동 계정을 만들어 파일노리 같은 데서 몰래 야동을 다운받아 돌려보던 시기에, 하루키의 소설은 나라가 허락한 합법적 야동과 같은 역할이었달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애의 묘사와 주인공들이 쿨내를 풀풀 풍기면서 섹스하는 장면이 어린 내게는 큰 자극이었다.


이후에 하루키의 장편소설을 몇 권 더 읽었는데, 대부분 ‘어쨌든 결국 같이 잔 이야기’였다.

그 <1Q84>도 요약하자면 종교 단체의 소녀를 매개로 암살자였던 첫사랑과 자는 이야기였고,

<노르웨이의 숲>은 같이 잔 여자가 자살하고 그녀를 뼈저리게 추모하다가 중년 여자와 잔 이야기였으며,

<태엽 감는 새>는 확실히 같이 자긴 잤는데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이야기였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같이 잔 적도 없는데 남들이 같이 잤다면서 욕하는 이야기였다.


처음 그의 소설을 볼 때만 해도 이제 갓 겨털이 났던 뽀송이였지만 보면서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런 섹스 장면들이 더 이상 자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장면들이 왜 등장해야 하는지 설득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의 소설에 항상 등장하는 소재들이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실종, 도시의 권태감, 끝없이 깊은 우물

초현실주의적인 존재와 ‘의식 아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시에 진행되는 구조

평이한 문체로 현실 세계에서 의식 아래 세계로 이음매 없이 이동하는 표현들


이후에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들이 대체로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으며 그의 반복적 모티프의 사용은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를 “난해한 스토리를 평이한 문체로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을 그리며, 그 과정에서 어쨌든 누군가와 잔 이야기를 풀어쓰는 작가”로 결론 내리고 이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렇게 형성된 나의 어떤 편견과 함께 <기사단장 죽이기>를 건너뛰고, 몇 년 만에 읽은 하루키 작품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은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이 작품에도 역시 비현실적인 세계인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등장하나, 그것이 이전 작품들처럼 현실과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또 불필요한 성적인 묘사나, 섹스 장면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나를 피로하게 만들었던 하루키스러움이 많지 않은 작품이라 오히려 좋게 느꼈던 것 같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현실 세계가 구분되어 있고, 본체와 그림자라는 개체가 분리되어 있다. 도시에 있는 게 본체인지 현실에 있는 게 그림자인지 누가 본체고 누가 그림자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그것이 이야기의 장치이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법에 설득력이 있었다.


좋아하던 소녀에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듣게 되고 어느 날 문득 도시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를 다루는 1부, 도시 밖으로 탈출한 자신이 본체라 생각하는 그림자를 다루는 2부, 그림자의 탈출을 돕고 도시에 남은 본체의 이야기를 다루는 3부로, 3개로 구획된 이야기를 통해 스토리가 난해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불확실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어떤 의미인지, 그 공간을 알려주고 사라진 ‘그녀’는 어떤 의미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녀는 왜 사라졌으며, 나는 어떻게 그 도시에 갔는지

도시 안에 남은 것이 본체인지 도시 밖으로 탈출하여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 그림자인지

이와 같은 질문들을 나름대로 답을 하며 읽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장을 넘기고 있었다.




당연히 모든 책이 그러하듯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본체와 그림자가 가지는 의미에 집중하며 읽었다.


회사에 다니고 일을 하며 단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아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인한 슬픔, 반복적인 일상 속의 권태감 또는 세상에 대한 무한한 상상 등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영혼이 앓는 역병’처럼 모든 이들이 품고 살아가는 내면의 이야기.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상 속 자아를 ‘본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내면의 이야기 세상을 탈출한 그림자에 불과할 수 있음을, 사람들은 자신의 역병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가두어 두고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벽이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불확실’한 벽임을.


그에 따라 본체와 그림자의 구분, 도시와 현실의 구분의 유무와 그 구획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나는 이 책을 이렇게 읽었지만 하루키가 분개하며 얼토당토않은 소리라 할 수도 있겠다.

근데 뭐 내가 회를 초장이나 간장이 아니라, 소금이나 된장에 찍어 먹는다고.

심지어 케첩이나 머스터드, 렌치 소스에 찍어 먹는다고 하더라도 하루키가 알빠누


하루키스럽지 않은 하루키 소설을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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