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는 순간
누군가 내게 철학적 배경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카뮈’라 할 것이다.
누군가 내게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카뮈’라 할 것이다.
최근 카뮈 형님의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반항하는 인간> 시리즈로 줄빠따를 맞았다.
예전에 <이방인>만을 읽고 카뮈를 이해했다고 잦자만하던 내게 시리즈로 호된 몽둥이찜질을 해주셨다.
아래 글들은 각각의 작품에 대한 나의 감상이다.
인류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었을뿐더러, 유일하게 발달된 정신세계를 가진 생명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깨가 너무 올라가 있었다. 마치 자기가 죽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했고, 그런 자신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했다. 거대한 우주에서 인간이 중심이 아니었듯, 지구의 다른 생명들처럼 그저 인간도 물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 생명이 태어나고 죽었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강요된 정답들과 기준들은 사실 그저 인간이 자기들끼리 만든 것에 불과하다. 법도, 국가도, 도덕도, 이념도, 체제도. 우리가 정답과 질서라고 생각했던 모든 관습과 이데올로기는 우주의 기준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답에 대한 ‘믿음’만 빼놓으면 어떤 사상이든 우주의 정답을 담지 못한다. 목표와 가치에 대한 것들은 모조리 인간이 꾸며낸 믿음의 영역이니까.
착하게 살았든 나쁘게 살았든 숭고한 희생을 했든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든. 결국 우주의 먼지가 되어 공허하게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사라지고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세상엔 정답도 기준도 없고, 그 끝은 누구나 죽어버릴 인생, 열심히 살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다가 죽기 직전에야 허무함과 부조리함을 느낀다. 거울을 보며 처음으로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신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꼭대기에 올렸다 싶으면 다시 굴러 떨어졌다. 무익하고 희망 없는 일보다도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나 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비벼대는 뺨, 진흙으로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드는 어깨, 그 돌덩어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 버티는 하체.
하늘이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이 긴 노력 끝에 산꼭대기에 돌을 올리는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돌은 다시 하계로 굴러 떨어진다. 돌을 따라 내려가 어차피 굴러 떨어질 돌을 다시 올려야 한다.
상당히 부조리하다.
다만 스스로가 숙명적이고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이 운명 속의 일상의 주인이라고 깨닫는 순간,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간이 긍정으로 답하는 순간, 인간적인 모든 것이 모든 인간의 근원임을 확신하는 순간.
시지프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기억 아래 통일될, 그의 운명이 된 이 행위의 연속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번에도 역시 바위는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는 굴러가는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몸을 돌린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정답,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준, 누군가 만들어놓은 체제. 그저 인간이 만든 가치들과 인간끼리 정한 이데올로기들.
당신도 그 누군가들처럼 정답과 기준, 체제를 만들 수 있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우주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임을 진심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역으로 언제든지 정답과 신념을 창조해 내는 마법 같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시리도록 부조리한 우주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어도, 모든 순간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고 정답으로 만들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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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카뮈의 철학은 <이방인> <시지프의 신화> <반항하는 인간> <페스토> 등 카뮈의 모든 작품을 읽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이해가 가능하다.
능동적 허무주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이라면 카뮈의 시리즈를 하나씩 읽어볼 것을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