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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Jun 28. 2022

구멍론

'구멍론'은 내가 직업상담을 하면서 만든 이론이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다.


직업상담 서비스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취업알선과 직업심리검사 해석 상담이라고 할 수 있다.

취업알선의 경우는 센터 내에 전담팀이 별도로 가동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서비스는 심리검사 해석이다.

심도 있는 해석 상담이 진행되고 나면 나와 구직자 사이에는 빠른 속도로 라포가 형성된다.


직업심리검사는 취업지원 프로그램 참여자들에게 필수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인데, 검사 결과를 통해 진로 설정에 큰 도움이 되는 도구이기 때문에 해석상담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검사를 통해서 어떤 분야에 흥미가 높은지를 알 수 있고, 성격의 다양한 측면도 탐색할 수 있다.

문제는 직업상담사들의 검사 해석능력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결국 어떤 상담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지난 7년간 수백 건의 해석 상담을 해왔는데,

우리나라 구직자들의 아주 흥미로운 특징 하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전반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심지어 첫 대면에서부터 삐딱한 말투와 냉소적인 표정으로 일관하는 구직자들 조차도 심리검사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절대 낮지 않다는 점이다.

웃기지 않는가?


신입 1년차 때에 나는 이러한 의문을 직무교육을 통해서 깨달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학습된 배려심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마치 집단무의식 처럼 말이다.


문제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매우' 또는 '지나치게' 높은 구직자들이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믿음, 수용성, 휴머니즘까지 높게 나타나면  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다.

"선생님, 이러면 호구 잡히거나  사기 당하기 딱 좋아요."


배려심이나 수용성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아름다운 미덕이다.

하지만 뭐든지 과유불급이고, 미덕과 악덕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숱한 임상을 통해서 내가 확인한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은 대체로 거절을 잘 못한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오늘 하루 종일 컨디션이 안좋아서 겨우겨우 퇴근시간 까지 버티었는데,

그런 나를 붙잡고 동료가 자기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오면 그들은 절대 거절을 못하고 기어이 자기 학대를 범하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높은 이타심의 발로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인정욕구에 사로잡혀서 거절을 못한다. 당신은 어느 쪽에 가깝냐고 물으면서 구직자의 내면을 함께 들여다 본다.


올해초에 만난 30대 후반 미혼 여성의 경우가 단적인 사례이다.

그녀는 인정욕구 때문에 회사에서 전천후 직원으로 자기몸을 혹사하다가 국 번아웃 상태가 되어서 퇴사를 하게 되었다.

"저 친구는 못하는 일이 없어."

"저 친구는 뭐든 잘해."

이런 평판에 도취되어 도끼자루가 썩는 줄도 모르고 신명나게 일을 했는데, 정작 건강을 해치고 퇴사에 직면했을때 그녀 옆에 남아 있는 동료는 없는 것이다.



이타심 때문이건 인정욕구 때문이건, 내 몸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건 절대 미덕이 아니다. 나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상충하는 순간에는 나에 대한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나에게 남은 에너지의 여유분이 있을 때여야 한다. 거절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하고, 거절의 기술도 필요하다.


거절에 취약한 그들은 어쨌든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착한 사람들이 관계에 휘둘려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정말 싫다.

바로 그때 나의 구멍론이 등장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열변을 시작한다.


어느 조직에나 두 종류의 구멍들이 있다.


첫번째, 구멍A는 말그대로 업무능력에 하자가 있는 동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공공기관에 입사한 후에 구멍A들을 여럿 만났다. 상담팀 동료직원 2명이 지난 4년간 육아휴직을 썼기 때문에

여러명의 대체 계약직 상담사들이 거쳐 갔는데,

그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 무능력자들도 있었다. 더 최악은 일도 못하는데 인성까지 쓰레기에 가까운 상담사도 3명이나 거쳐 갔고,

그 과정에서 긴 시간 동안 나를 포함한 동료들이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업무처리의 미숙으로 발생하는 민원 역시 동료들이 땜빵하고 수습해야 했다.

아, 물론 계약직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계약직이라도  업무능력이 출중하고 인성도 훌륭한 상담사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두번째, 구멍B는 업무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다만 그들은 너무나 약고 영악하여 끊임없이 잔대가리를 굴리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업무를 동료에게 전가한다. 바로 이때 구멍B들의 타겟이 되는 이가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쩌는 동료가 된다. 그 불여시족들은 상대방의 이타심이나 인정욕구를 적절히 자극하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은 모두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는다.

하지만 구멍들은 80프로의 일을 하고 100을 받아가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높은 이들은 120프로의 일을 하고 100을 받아간다. 구멍들의 20프로를  떠안는 이들은 늘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나는 얍삽하기 그지없는 구멍B들도 용납이 안되지만, 자신의 역량미달을 꿋꿋하게 유지하는 구멍A들도 싫다. 직장은 사회봉사기관이 아니지 않은가.


이대목쯤에 이르면 더욱 핏대를 올려가며 구직자를 추궁한다.

"선생님은 열 안받으세요? 화딱지 안나세요? 안억울해요?" 하면서 말이다.


거절을 하면 상대방이 상처를 받거나, 혹은 관계가 훼손될까봐 걱정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조언한다. 거절을 했다고 훼손되는 관계라면 손절하셔도 된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경험으로 깨달은 깊은 통찰을 구직자들에게 이렇게 전수한다.


"선생님, 제가 겪어보니까요, 우리 각자는 자기 맡은 일만 잘해도 아주 훌륭하다는 거에요.

  120프로 안해도 되니까  내 몫만 완수하고 옆동료들에게 민폐만 안끼쳐도 훌륭한 직원인 거에요. 본인의 목표의식이나 성취감을 위해서라면 120프로 이상 일해도 되요,

  하지만 구멍들을 땜빵하느라 120프로를 하는 짓은 멈추셔야 해요. 내가 상대방을 휘둘러도 안되지만 상대방에게 휘둘려서도 안되요, 아셨죠?!"


나의 구멍론을 거쳐간 그들은 좀더 현명하고 편안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까?

직장 내에서 모든 동료들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바람직한 처세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평판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건 부자연스럽다.

나는 오히려 지난 7년간 쓴소리도 하고 갈등도 겪으면서 동료들과 이제 비로소 완벽하게 편안해졌다. 각자의 성향을 인정하고 선을 넘지 않으면서 이제 업무적으로 어벤저스팀이 되었다.


어쨌든 분명한건, 구멍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직장인의 미덕 아닐까?

니들 언제까지 그러구 살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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