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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Mar 27. 2023

휴재를 끝내고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

  휴재라고 한다면 휴재일 수 있을 것이다. 2주 정도?를 글을 연재하지 않았다. 사실 여기까지만 쓰고 그만 쓰려고 했다. 내 민낯을 낱낱이 고하는 이 글이 결국 내 치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지, 세상에 밝히고 싶지 않은 내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는 데 경계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필명이긴 해도 나를 충분히 특정할 수 있는 글이다. 내 글을 부디 내가 실제로 아는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일이 있었다. 전에 쓴 남자친구에 대한 내 슬픈 예감? 에 대한 글은 실제 사연으로 얘기하자면 일단락이 됐다. 구구절절하게 얘기할 필요 없이 짧게 얘기하자면 남자친구는 많은 것을 이해해 줬다. 현재 내 상황과 라운지 알바를 관두는 것에 대해 그는 내게 많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가 우려했던 대부분의 것들은 그의 이해 가능 범위에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인형과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미 이해했다고. 나는 너를 더 많이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내 과거의 영광적인 신체 흉터부터, 정신과 진료를 오래 받고 있는 사실, 내 경제적 형편, 사회 적응력까지, 다 이야기했다. 솔직히 경계선 지능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다 털어놓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그 안의 것들을 거의 다 꺼내놓은 셈이다. 물론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이 빠져나가지 않은 것처럼, 경계선 지능이라는 내가 영원히 밝히고 싶지 않은 진실만은 재빨리 상자를 덮어 밀봉했다. 그에게 그 진실만은 도저히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건 금기나 다름없다. 그 진실이 말해지는 순간, 설사 그가 그마저도 사랑으로 이해한다 해도, 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 그 앞에 내 밑바닥까지 싹싹 드러내 치욕스러워지고 싶지 않다.


  라운지 알바는 4월 2일까지 하기로 했다. 다음 주 두 번이 더 남은 것이다. 라운지 알바는 내 사회 진출의 또 다른 큰 실패다. 근무하는 내내 나는 일반 직원들의 업무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근무 수행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대한민국에 백화점 특별고객이 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도 처음 들었다. 몰아닥치는 손님 수만큼이나 빠른 작업 속도, 높은 효율성이 동시에 요구됐다. 음료 제조 자체는 어렵지 않았으나 모든 것이 정신없이 빠르게, 동시에, 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환경에 나는 혼비백산했다. 솔직히 말해 라운지 알바는 내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거기서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일을 못하는 직원이 됐다. 직원들, 아니 내 나이를 생각했을 때는 아이들이라고 불러야 맞을지도 모를 정도로 직원들의 나이는 너무 어리고 나와의 나이 차는 컸다. 스물두 살의 나이도 나와 비교하면 충분히 어린 데 더 어린 직원이 있었다. 스무 살.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열아홉부터 일한 직원도 있었다. 나와 나이 십 년 차다. 나는 놀랍고, 두려워졌다. 스무 살, 스물두 살의 그 어린 나이부터 사회의 일을 섭렵한다. 내 나이 서른, 이십 대를 지난 십 년간 일구지 못한 일을 그 애들은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해낸다. 그것도 잘. 나와 십 년 가까운 차이다. 그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그들과 나의 격차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다. 앞으로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일반인들은 꽤 어린 나이부터 성취를 시작하니 내 나이대 일반인과 나의 차이는 이미 하늘과 땅 차이. 내 나이대면 직장에서든 소위 알바씬에서든 한몫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거기서 나와 같은 느린 학습자들, 아니 학술적으로 정의한 그대로의 용어인 경계선 지능인들의 소외와 도태를 보았다. 물론 경계선 지능인들 중에서도 그 핸디캡을 극복하고 뛰어난 성취를 이룬 이들도 존재하는 것으로 아나 내가 만나보고, 겪어본 경계선 지능인들과 아마 대다수의 경계선 지능인들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속도에서의 크나큰 차이는 결국 차별을 만들 것이 분명하다. 사회에서 우리들의 설 자리를 더 빼앗을 것이다. 대다수의 경계선 지능인들이 청원을 올리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안다. 라운지 알바에서, 나에게 지시하고 때로는 무시하는 그 어린 직원들을 보며 나는 더 큰 그림을 보고 두려워졌다.


  부정적인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복지관에서 나는 어르신 대상 바리스타 교육도 맡게 됐다. 내 안식처, 내게 든든한 일자리가 되어주는 복지관에서 나는 사회에서와는 정반대로 여기서만큼은 에이스로 일하고, 어르신 대상 수업도 내가 거의 주강사로 강의하게 됐다. 참 아이러니하다. 일반 사회에서는 그렇게 일을 못하고 적응 못해도, 여기서는 능수능란해진다는 게. 어쩌면 여기서조차도 능숙하지 못한 청년들은 이런 일자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됐을까 싶다. 물론 이 말의 함의에는 나도 포함된다.

 

  바리스타 교육과 강사로서의 내 활약 같은 나름 긍정적인 얘기는 다음회 때 더 자세히 기술해보고자 한다. 이 얘기로도 한 지면이 꽉 찰 거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남자친구의 이해와 라운지 알바를 하며 느낀 내 두려움은 양면의 종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 긍정과 부정에 해당하지만 사실 같다. 남자친구의 이해도 내가 일반인이라는 전제에서 온 것이다. 내가 그들과 같은 일반인처럼 보이지 않으면 남자친구의 이해는 어디까지 갈까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는 어디까지 나를 이해할까. 이미 높게 벌어진 일반인과 나 사이 격차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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