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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cyun Jul 17. 2024

바람아 불어라 <1>

소설 같지만 소설이 아닌 나의 이야기

여진


초등 임용을 막 시작하던 그 해 겨울, 수년만에 재회한 오래전 친구와의 알 수 없는 심한 다툼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한 해를 시작했던 나는 내 생의 최악의 해가 시작되었다는 경고를 알아챘어야 했다. 술에 아주 취한 그 친구는 나를 심하게 때렸고 코뼈가 부러지고 얼굴이 퉁퉁 부은 나를 길가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또 다른 친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구급차를 불러 나를 전남대학교 응급실에 데려다 놓았다. 그 친구가 경찰에게 거짓을 진술하였고 의심스러웠던 경찰의 추궁이 있고서야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는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듣게 되었다. 그 뒤로 그 친구들과 다시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 그 사건을 다시 떠올린 그들이 용서를 구할 거라 생각했던 내 막연한 기대는 나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갔다.


그 해 늦봄, 4학년 1학기 마지막 교생 실습을 마치고 나니 어머니가 낙상하여 발가락 골절을 입었다. 어머니가 다리에 깁스를 하고 다시 걸어 다닐 즈음 아버지가 쓰러졌다. 9월이었다. 여느 해와 같이 뜨거운 날씨에 아버지가 더위를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무지가 병을 더 키웠다.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몸에 힘이 없다고 하며 하루종일 두통을 호소하고 누워만 있던 아버지. 평범한 일상 속 삼겹살을 구워 먹고 거울을 챙겨 기숙사로 돌아갔던 그날 밤 10시, 아버지가 응급실에 있다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카톡으로 덤덤하게 지금 응급실이라는 어머니의 문자를 받고 나는 택시를 불러 전남대학교 응급실로 향했다.


아버지는 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고 황망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간헐적으로 움직임이 돌아오던 오른쪽 팔과 다리를 휘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몰랐던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연신 주무르고만 있었다. 괜찮냐는 질문만 되뇌던 어머니의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눈빛과 무기력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응급실에서 간호사는 나에게 병원 앞 편의점에서 기저귀와 면사포와 물티슈를 사 오라고 하였다. 시간이 몇 시가 되었는지도 잊은 채로 급히 뛰어다녀온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임용 시험을 한 달 남짓 남긴 10월 1일, 대학에서 전체 사설 모의고사를 시행하였다. 난 과락을 겨우 면한 38점을 받았다. 아직까지 임용 각론 요약 강의조차 다 마치지 못한 나에게 시험 문제들은 너무나 어려웠다. 남은 시간은 6주. 일주일에 10점씩 올리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부터 낮에는 기출문제를 풀고 오답을 잡아내었고, 밤에는 중환자실 한쪽 구석에서 내가 놓쳤던 각론을 정리하며 암기하기를 반복했다. 아직, 오른쪽 절반의 신경이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는 배설이 되지 않아 부풀어 오른 배를 끌어 안고 괴로워했다. 잠을 자지 못해 얼굴은 퀭했고,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무기력하게 나날을 지새웠다.


나는 매일같이 기숙사 옥상에 올라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수없이 반복했다. 줄담배를 수도 없이 피워댔다. 한숨을 쉬고 또 쉬어도 답답한 마음은 도무지 풀려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임용시험을 얼마 앞두지 않은 때에, 어머니가 광주에 모셔와 돌보시던 외할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어하시고 식사도 어려워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로부터 두 해가 지난 뒤 내가 입대하여 일병을 갖 달았을 때 외할머니는 돌아가셨는데, 이때부터 외할머니는 가족들을 서서히 알아보지 못하셨다.


나의 대학교 마지막 해는 그렇게 지나갔다. 도대체 언제 멈추는지 알 수 없는 여진처럼.




1차 논술 20점 만점에 17점, 필기 80점 만점에 64점. 2차 실기 면접 100점 만점에 97점으로 1600명 중 1404등으로 임용에 합격하였다. 우울증에 빠진 부모님께서 이혼과 별거를 주제로 다투는 와중에 어머니를 각별히 여기시던 고모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발령을 기다리며 광주에서 기간제 교사를 하던 나는 종종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일이 힘들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나온 초기 6개월간 정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재활을 하던 아버지는 절뚝거리며 걷고 손가락을 겨우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는 재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심한 우울감과 현실 비관에 빠졌다. 10여 년 전 지속되어 온 시댁의 일방적인 태도와 이기적인 행동들로 상처를 깊게 입은 어머니는 시댁과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는 자기 비관에 빠져 시댁을 옹호하고 형제들을 감싸고돌았다. 어머니와 혼인을 할 때 말했던 모든 것들이 다 거짓이었고 어떤 삶을 살아왔던 것이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쏟아내며 어머니의 속을 한껏 뒤집어엎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애를 두고도 속없이 정신을 차릴 생각을 하지 않는 남동생을 뒤로하고 한껏 힘들어하던 나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발령이 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2018년 2월 나는 경기도 안성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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