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백년손님 PART 2] 시부모가 처음인 ‘시린이’를 위한 조언
요새는 이혼이 흠도 아니죠. 너무 흔해서 말입니다. 졸혼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대유행’입니다. 지금 고부갈등을 겪고 계신 시어머니께 묻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이혼하셨나요? 이혼하셨다고요? 그래서 아들도 이혼하라고 권하시나요?”
“이혼은 안 하셨다고요? 그런데 왜 아들은 이혼으로 몰고 가시나요? 당신은 이혼하지 않고 온전한 가정을 꾸리시면서요.”
부부가 이혼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당사자 간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의 문제로 인해 헤어지는 것이라면 그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겁니다. 시부모 입장에서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며느리도 시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겠죠. 이 와중에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며느리와 아들은 서로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결혼까지 한 걸 보면요. 보통은 서로 죽고 못 살아서 결혼을 하니까요. 아들과 며느리도 처음부터 서로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차츰 알아가면서 마음이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사람 중에 결혼을 결심하게 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이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만나자마자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고 친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서로 정말 잘 맞고 좋은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마치 신입사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에게 맞춰주느라 서로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일방적인 맞춤형 관계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후자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사회와 가정이 이 난리를 피우는 거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모한 베팅이 아닌 확실한 것에 배팅해야 합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니까 그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아직 모호하죠.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친구 사이도 억지로 친해지려고 한다고 절친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이좋은 건 바라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절친 되려다 절교할까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그 절교는 결국 아들과 며느리의 절교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이런 불상사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끼지 않는 게 좋습니다.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 예의라는 거리를 두고 지내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거의 이런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족과 절친 2~3명 빼고는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이혼’이 유행이라고 굳이 ‘아들’을 유행에 뒤처지게 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세요. 이런 유행은 따라가지 않고 구식이란 소리를 듣는 게 더 기분 좋은 ‘구식’이니까요. 재혼하면 되지 않냐고요? 그러면 그때는 자식을 독립시킬 마음의 준비가 될까요? 아니라면 재혼도 역시 결과가 같겠네요. 재혼까지 해서 고부갈등을 참고 살 여성이 세상천지에 있을 리 만무합니다. 손주는 할머니 때문에 온전한 가정에서 자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요. 그때는 독립시키시겠다고요? 그럼 차라리 지금 독립시키세요.
아들이 결혼하고 나면 며느리에게 안부 전화든 방문이든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엔 며느리도 어른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고 마지못해서 하겠지만, 그건 형식적인 행위입니다. 상사가 그걸 원하니까 맞춰주는 경우와 같은 거죠. 시어머니는 진심이 없는 행위에 스스로 만족할 수 없고 끝없이 공허할 뿐입니다. 며느리는 하긴 하면서도 양가감정(논리적으로 서로 어긋나는 표상의 결합에서 오는 혼란스러운 감정이나 태도가 함께 존재하고 상반된 목표를 향해 동시에 충동이 일어나는 상태)에 휩싸입니다. ‘그래, 어른이 하라고 하면 해야지. 남편의 부모님이시잖아.’라는 생각으로 전화를 하다가도 ‘이걸 내가 왜 하고 있지? 도대체 왜 해야 하지?’ 하는 의구심과 반항심이의 양립한 상황에서 조만간 그만두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시부모는 서운하고 괘씸한 생각이 듭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기진맥진합니다.
더 쉽게 생각해 볼까요. 처음부터 기대치가 100%여서 며느리는 기대치에 미칠 수가 없으니 그만큼 불만이 생깁니다. 애초에 그 누구도 100% 기대치를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경우는 며느리를 앞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기대치가 0%이면 어쩌다 뭘 하나 해도 만족스럽습니다. 살아보니 처음에 좋은 관계보다 나중에 더 좋아지는 관계가 낫고, 처음에 잘사는 것보다 나중에 잘사는 게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비교가 아닌 이전보다 같거나 조금만 나아져도 만족스러워지는 거죠. 이렇듯 만족감은 상대적입니다.
현실적으로 기대치가 없는 것이 시부모가 행복한 방법이자 며느리도 행복할 수 있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사실 좋은 소식이라는 건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살아보셔서 잘 아시잖아요. 오히려 나쁜 소식이 더 많은 게 인생입니다.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와요.”
“남편이 돈을 못 벌어요.”
“아이가 생기지 않아요.”
“며칠 전 차 사고 났어요.”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려고 해요.”
“아이가 아파요.”
“며칠 전 사기를 당했어요.”
오죽하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요. 결혼한 자녀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은 희소식입니다. 연락이 없다는 건 큰 사건이 없다는 얘기고 어쨌든 둘이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그런 과정을 겪고 있다는 얘기죠. 그러다 드문드문 좋은 소식도 들려옵니다.
“저희 임신했어요.”
“건강한 아이 낳았어요.”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어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아범 승진했어요.”
살다 보면 좋은 소식도 있고 나쁜 소식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소식은 희소식, 좋은 소식이기만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매일매일 좋은 소식이 전해지는 게 더 낫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