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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황 Apr 24. 2023

'진실'은 규정되고 정의된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고


역사에는 ‘if’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역사는 ‘인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원인의 처치가 반드시 결과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역사는 우연과 인과가 뒤섞여 혼재하고 있다. 물론 무엇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움직일 때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위의 나비효과가 큰 역사적 사건을 만들기도 한다. 사라예보의 한 죽음이 세계 천만의 죽음을 만들었듯이 말이다.


여기 ‘if’로 만들어진 일종의 ‘멀티버스’ 소설이 있다. 이 책은 김연수 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이다. ‘유령작가’는 흔히 대필 작가를 의미한다. 이 책의 제목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인과’로 규정되지 않을 만한 이야기를 대신 작성했다는 뜻이다. 본 책은 여러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20세기에 벌어진 히말라야 등정 실패 사건부터, 저 멀리 제너럴셔먼호 시절까지 다양하다. 이 개별 단편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하지만, ‘역사 저술’은 아니다. 역사적 틈새에서 발칙한 상상력을 가하여, 흔히 말하는 ‘역사의 필연성과 그 해석’을 부정하고 있다. 이 책은 ‘진실’에 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안중근만이 반드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 것인가, <춘향전> 속 춘향은 정말 ‘열녀’였는가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적 진실’을 뒤집어엎는다. 


역사 강의를 들으면 ‘A가 B를 초래했고, 그 결과 C가 일어났다.’는 식의 설명이 흔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랬을까? ‘A→B→C’라는 논리가 ‘정말’ 있었을까? A와 B 사이 D는 없었을까? C는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닐까? 우리가 흔히 과거에 ‘어떤 것이 있었다’라고 하는 말은 후대에 규정된 ‘해석’ 일뿐이다. 역사적 사건의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그 당시에 숨을 쉬던 자들만이 알고 있다. 다음으로 소개할 세 수록 단편은 자의적 진실 규정에 반기를 든다. <뿌넝숴>는 기록된 ‘진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남원고사(南原古詞)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은 들키지 않은 거짓은 ‘진실’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진실’ 그 자체의 허위성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는 결국 ‘진실’이 그 자체로 ‘진실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탄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뿌넝숴>


<뿌넝숴>의 주인공인 중공군은 한국전쟁을 회상하며 소설가에게 이야기를 꺼낸다. 전쟁 당시 폭격을 맞고 쓰러져있던 남자는 한 여자 의무병에 의해 구출된다. 상처를 치료한 둘은 어느 외딴집에서 숨어 사랑을 나눈다. 섹스 중 남자는 상처가 벌어지며 피를 흘린다. 사랑을 나눌수록 서서히 죽어가는 남자. 여자는 서로의 관계와 삶 죽음 사이를 갈등한다. 관계 중 수혈을 해주는 여자는 결국 죽고 남자는 살아난다. 소설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치이지만, 직접 겪은 자만이 알 수 있다며 “뿌넝숴”라 말한다.


본 작품은 생명의 원리에서 삶-죽음이 역전되는 순간을 그린다. 죽어가는데도 애원하며 섹스를 원하는 남자와 죽음을 더 이상 보기 싫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자. 마치 거짓 같은 이야기이다. “대체 왜 그랬지?”. 밤에 종종 누워서 하루의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때때로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 순간은 그 시간에 머무른 사람을 홀려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돌이켰을 때 이상함을 눈치채게 만든다.


“뿌넝숴(不能說)”. 뜻은 ‘말할 수 없다.’이다. 일화를 묻는 소설가에게 직접 겪었지만, 말로는 담을 수 없을 정도의 경험이 중요하다며 꺼내는 말이다. 우리도 종종 누군가에게 “이건 설명하기 힘든데.”, “해보면 알아.”와 같이 경험담의 서두를 던진다. 그 이유는 그 당사자만이 공감하는 기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연애, 우정, 사랑과 같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눈에 진심을 건네는 순간이 그렇다. 힘들 때 친우가 내 등을 토닥여 줄 때의 순간, 남녀가 눈을 맞추다 ‘찌릿’한 순간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순간에 몸을 맡긴 인물들의 마음을 굳이 분석해 보자면, 전쟁에서의 외로움, 반복된 죽음의 싫증, 삶의 회의가 원인이 될 수 있다. 수많은 경험과 순간의 감정을 이로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런 게 있어.”로 정리된다. 누군가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할 수 없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자. ‘군대 썰’을 아는가? 유튜브 등지에서 군대 썰은 현실에 없을 법한 스펙터클한 현실 스토리로 인기를 끌고 있다. 군대 썰을 담은 애니메이션이 인기에 힘입어 드라마화되었을 정도이다. 이 이야기는 일반적인 ‘썰’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말이 안 되면 안 될수록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이다. 특히 군대 경험, 일명 ‘군필’과 ‘미필’에 따라 반응 역시 다르다. 군대를 다녀온 자에게 ‘소설도 그렇게 쓰면 욕먹는다.’라고 할 정도의 이야기는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반면 군대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공상’이다. 이들의 큰 차이점은 ‘경험’이다. 폐쇄적 공간에서 논리의 비약과 약화를 겪은 이들은 “뿌넝숴”를 본능적으로 경험했다. 따라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말이 되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논리적 사건 분석에 의문을 준다. “뿌넝숴”를 활자로 담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역사책은 ‘진실’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미시적으로는 ‘일기’ 역시 진실을 담을 수 없다. 심지어 당사자끼리도, 제삼자도 모두 사건을 다르게 기억하는 ‘라쇼몽’이 있었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진실’로 규정해야 하는가.






<남원고사(南原古詞)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춘향은 부당한 수청을 당당히 거부했던 열녀다. 적어도 <춘향전>에서 그렇다. <남원고사(南原古詞)에 관한 세 개의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에서 춘향은 꽤 정직하지만은 않다. 우리가 흔히 알던 탐관오리 변 사또는 지방 토착 세력 견제에 전전긍긍하는 신임 부사다. 반면 춘향은 그 권력 경쟁 구도 속에서 정당한 신분적 행동을 거부한다. 심지어 다른 이와 밀약을 맺는 듯하다. 암행어사도 변 사또의 오랜 벗이었으며, 후대 판소리는 이를 정반대로 묘사하여 우리가 아는 <춘향전>이 된다.


작가는 이 단편을 통해 <춘향전>의 빈틈을 엿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여 역사의 허구성을 제시한다. 즉, 진실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것이 ‘진실’이 되어버린다. 물론 작가가 비튼 ‘춘향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 일 수도, ‘진실의 복원’ 일 수도 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규정된 진실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夘乙抱遣去如’. <서동요> 구절이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연을 맺고 싶어 거짓을 지어 퍼뜨린다. 그러나 거짓은 결과적으로 ‘진실’이 되어버렸다. 들키지 않았더니 진실이 된 것이다. 춘향도 그렇다. 만약 춘향 이야기가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든, <춘향전>을 통해 우리는 변 사또를 악인으로, 춘향을 선인으로 알고 있다. 일종의 텍스트 집합이 후대 사람들에게 진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기록에는 관점이 부여될 수밖에 없다. 현상 나열은 역사로 취급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파급효과를 설명하는 것이 역사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 당대 사람이 ‘아무 의미 없이 했던 것’이 후대에 대단한 의미가 될 수 있다. 모든 기록이 정말 있는 그대로 모습을 그린 것인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춘향전>의 탄생 이유가 사또에게 앙심을 품어서 일 수도, 당대 여성상을 고착하기 위해서 일 수도, 그냥 단순 재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진실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진실이란 있을 수 없다. 역사는 모든 사람이 합의할 만한 각주에 불과할 뿐이다. 그 속에는 들키지 않은 거짓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다양한 방향으로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


한국전쟁 시기, 서울 수복 후 화자는 국군에게 공산당 부역자 일명, ‘빨갱이’로 몰려 취조당하고 있다. 그녀는 한강 다리가 끊길 적 서울에 남은 ‘잔류파’다. 살아남기 위해 지금껏 권력의 편에 서서 ‘믿는다는 사실을 믿어왔다’고 항변한다. 그 덕에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로, 한국전쟁 공산당 치하 서울에서 ‘반동분자’로, 서울 수복 후에는 ‘빨갱이’로 불렸다. 결국 그녀는 총살당한다.


진실은 정해지는 것이다. ‘친일파’이자 ‘반동분자’이자 ‘빨갱이’였던 주인공. 기회를 잡는 데 실패하며 죽음에 이르는 그녀는 <꺼삐딴 리> 같은 기회주의자로 보인다. 그러나 기회를 잡고 생존에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선구안’이 있다고 평할 수도 있다. 물론 권력의 비호를 노리고 자기 이득을 챙기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살고 싶어서 발버둥 친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진실은 언제나 판단하는 사람의 몫이다.


‘역사’는 일련 행위에 의미 부여 껍데기를 입힌 것이다. 이것은 곧 ‘진실’이자 ‘진리’가 된다. 그녀가 어느 세력에 가까웠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의도를 가졌는지도 알 수 없다. 진술의 형태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체 판단에 따라 양쪽은 인민재판을, 총살을 가한다.


“국민들을 인민군 치하에다 팽개쳐두고 즈네들만 도망갔다 와가지고 인민군 밥해준 것도 죄라고 사형시키는 이딴 나라에서 나도 살고 싶지 않아. 죽여라, 죽여”.

(임기상 (2015). <박완서 "나는 그때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노컷뉴스. https://www.nocutnews.co.kr/news/4428667.)


1951년 박완서 작가는 자신을 끌고 가는 경찰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아무 의미 없이’ 연민으로 한 일이 다른 편에게는 ‘반역’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중반 유혈이 낭자하던 시기만의 일은 아니다. 지금도 그렇다. 민주당에 국민의힘은 ‘국민의 짐’이자, 민족 반역자다. 국민의힘에 민주당은 ‘민ㅈ당’이자 빨갱이다. 시시각각 상대의 흠을 잡고 총을 겨누고 있다. 각자는 행동 그 자체에 주안을 두지 않는다. 그저 방아쇠를 당길 명분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는 기자회견에서, 청문회에서, 인터뷰에서 ‘진실’로 규정된다.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무형적 산물이다. 의견의 합의가 역사로 정의된다. ‘역사’라는 입법 절차는 ‘진실’을 규정한 뒤 이를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진리’가 탄생한다. 작중 언급된 ‘각주’와 비슷하다. 여러 사람이 합의할 만한 해석인 각주는 하나의 진리나 진실이 존재하지 않음을 내포한다. 세 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를 만들듯이 거짓이더라도 ‘믿음’이 있다면 진실이 된다. 실체 없는 산물은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되었다. 믿지 않으면 허구 소설에 불과한 ‘종교’는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창조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 ‘화폐’도 교환 가치라는 무형적 믿음으로 그 존속이 유지되고 있다. ‘정치’ 역시 그렇다. 손에 잡히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영에 따라 한쪽이 ‘선’으로 반대가 ‘악’으로 규정된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헤게모니는 불가역적이다. 믿음이 깨지면 인간이 구축한 모든 사회 시스템은 무너진다. 뱅크런, 아나키, 아노미. 믿음이 견고했을수록 그것이 붕괴했을 때의 결과는 예측 불허다.


김경민. (2023). <日 국립전시관 "독도는 일본땅, 미래엔 꼭 갈 수 있을 것">. 파이낸셜뉴스. https://www.fnnews.com/news/20230412211952

‘진실’은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다. 그렇기에 이를 이용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 역시 존재한다. 특정 믿음을 지배하면 ‘헤게모니’를 지배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든지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다. ‘믿음’은 이를 쥔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넷플릭스의 <나는 신이다.>는 그 ‘믿음’ 시스템을 폭로했다. 신자에게 이 다큐는 고난과 시련이며 역경이다. 우리를 더 단단히 만드는 ‘빙벽’이자 잠시 멈추고 기다리면 되는 ‘화이트 아웃’이다.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 JMS를 비롯한 해당 종교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지배하여 사고(思考)를 지배하면 미래도 지배한다. 일본 역사서는 잔혹과 야만의 역사를 누락한다. 식민 통치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된 일본인은 식민 역사에 긍정적 이미지를 갖게 된다. 그 방향성이 일본 국립 영토·주권전시관 홍보 영상에서 나타났다.






우리의 자세


과학에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류 가능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 추구를 위한 과학적 자세가 이용되기도 한다. 어떤 정치인은 정책 명에 ‘과학’이라는 브랜딩으로 반대편을 ‘비과학’으로 믿게 만든다. 언론 역시 특정 ‘믿음’을 부여하고 가속한다. 믿음은 불가역적이다. 따라서 한번 형성된 믿음은 편향적 자세를 ‘진실’로 규정한다. 유튜브만 해도 그렇다.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는 채널을 가보자. ‘빠’들이 가득하다. 비판하는 이들은 ‘악마’ 요, 진실을 가리는 ‘안대’다. 이러한 진실 이용을 양지하지 않으면 진실과 지식의 실종 시대가 찾아올 것이다. 편향적 채널은 전문가를 초빙해 신빙성을 부여한다. 본인의 지식을 이용하여 ‘진실’을 함부로 규정하는 이들을 과연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위 ’ 지식인’은 마치 본인의 말을 ‘진리’이자 ‘법칙’으로 포장한다. ‘절대’라는 것은 허상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연구와 탐색을 게을리한 ‘지식’이 편향적 ‘진실’을 마취시키고 있다. 어느 누가 ‘절대 법칙’을 운운할 수 있을까. 단세포가 인간이 되기까지 ‘의도적 진화’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의 탄생은 우연의 연속이 가져온 결과다. 우연이 우덕순이 아니라 안중근을 ‘안중근’으로 만들었듯 말이다. 진실을 규정하는 이들은 ‘우연’을 인과와 필연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계심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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