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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리황 May 11. 2023

'사회성'의 반의어, 양심

<양심을 보았다>를 읽고 나서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리면 어떡하실 거예요?”
면접 단골 질문이다. 면접관이 ‘어디 한번 보자’라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 면접자는 아마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법과 회사 이익에 해가 가는지 생각해 본 뒤, 선배에게 조용히 물어 대처하겠습니다.”
“본인 판단은 없다는 건가요?”
“제 생각만 그런지 확인하고 저만 그렇다면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면접관은 고개 대신 눈썹을 슬쩍 움직인다.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질문. 그러나 안 물어볼 수도 없는 질문. 면접관이나 면접자나 다들 짜인 대로 묻고 답한다. 이른바 ‘기본 질문’이다. 면접관에게 이 질문은 조직 적합성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사람이 조직에 들어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일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지 판단 근거다. ‘부당하다면 따르지 않겠습니다.’라는 답변이 나온다면 ‘일하기 껄끄러운 사람’이라는 의미다. 면접자는 경제적으로, 연봉의 기본 원칙처럼 ‘회사 내규에 따름’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질문이지만 적당하게 말하지 않으면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면접자는 ‘마치 원래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을 떼기 위해 자기 암시와 연습을 반복한다. 그게 ‘포인트’다.


취업준비생에게 이미 내면화된 이 질문. “무조건 나온다!”라며 준비하는 질문.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부당한 지시’를 뜯어보자. ‘부당(不當) : 이치에 맞지 아니함’. 합당한 도리에 맞지 않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청 업체 기술을 빼돌려 자회사에 전달한다든지, 다운 계약서를 쓰고 리베이트를 받는다든지 등이 있다. 이런 걸 상사가 지시한다면 우리 본능은 신호등을 켠다. 빨간불이 깜빡깜빡. 하지만 조수석에서 끊임없이 말을 건다. 결국 ‘시키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으로 신호위반을 감행한다. 어떨 때는 신호등조차 더 이상 켜지지 않는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심지어 조직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우리 내면 질서에 혼란이 자리 잡는다. 면접 질문에서 출발한 여러 내면화 작업은 결국 한 사람을 ‘조직’으로 표상시킨다.




내부고발이란

신호 위반을 고백하고 신호등 빛을 다시 돌리려는 일련의 행위. ‘내부 고발’. 지금껏 사회를 뒤흔든 사건은 내부 고발에서 시작한 사례가 많다. 해외에서 프리즘 프로젝트, 워터게이트, 펜타곤 페이퍼, 국내에서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 대한항공 갑질 사건 등이 있다. 그 중심에 ‘Whistleblower (내부 고발자)’가 있다. 조용해 보였던 사회에 환기를 시켜주는 휘파람. 이들이 부는 휘파람은 경종을 울리는 정직함으로 칭해진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 않다. 종종 ‘소음 공해’로 치부된다.


<미생> (2014). tvN.

<미생>의 영업3팀은 요르단 사업 비리를 밝혀내어 승진과 포상을 받는다. 하지만 분위기가 묘하다. 사내 게시판에 ‘꼭 그렇게 시끄럽게 해야 하느냐.’는 글이 줄줄이 올라온다. 내부 고발이 ‘배신’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내부 고발은 사회와 집단의 자정 작용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를 ‘악’으로 규정짓고 부끄럽게 만든 부정(不正)이다. 고발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돼’. 익숙한 대사. 많은 이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결과다. 영업3팀은 내부 고발로 적폐를 철저하게 드러냈지만 ‘문제아’로 불린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정보화 시대 살아있는 양심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내부 고발을 통해 영웅이 되는 자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선과 악의 애매한 구분, 스톡홀름 증후군, 고발자의 문란한 사생활처럼 고발 메시지가 위협받는다면? 증명이 어려워 단순 ‘고발’에서 그친다면? 시스템은 철저하게 ‘배신자’, ‘부적응자’로 낙인찍는다.



침묵은 왜 발생하는가

법치 사회의 근간은 무죄 추정 원칙이다. 증거주의적 입증은 귀책을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증거, 증언이 없다면 무죄다. 무죄를 바라는 조직은 새로운 증거 탄생을 막는다. 연쇄 증거 탄생을 저지하기 위해 내부 고발은 철저하게 거짓말과 위선으로 간주된다. 고발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특정 ‘분위기’는 내부자를 순종시킨다. 마치 ‘내부 고발’을 영웅적 행위로 칭하면서도 철저하게 의지를 박약 시킨다. 마치 정상인 것처럼 보여야 ‘마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분위기’는 살면서 우리가 많이 접한다. 마치 공기와 같기 때문에 그 분위기는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뜨뜻미지근한 반응,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들어도 못 들은 체, 눈에 거슬리는 행위를 가만히 바라보기. 사회적 바디랭귀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조용히 하라.’, ‘그만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이지 않는 분위기가 조직 구성원을 침묵하게 한다.



이얼 프레스 (2014). <양심을 보았다>. 이경식 역. 흐름출판.

도구적 합리성

<양심을 보았다>는 ‘분위기’를 설명한다. 앞서 언급한 면접 질문은 일종의 언질이다. 부당한 지시는 ‘부당하므로’ 내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사전 경고로서 우리들처럼, 평범하게 행동하라 요구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으로 설명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나치를 이루었듯, 세계를 뒤흔든 ‘악’은 특별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저 악행을 평범하게 대하고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행동 기준은 사회에 의거한다. 사회가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통칭 ‘리더’들은 조직원들에게 잔혹성을 내면화시킨다. ‘경쟁에서 도태되면 패배자’ 사고방식은 마치 원래 존재했던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고립의 공포

사회에서 추방은 곧 사망 선고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 DNA를 생존하게 만든 자연 원리이며, 더 나아가서 종교, 법, 과학 등을 발전시켰다. 죽음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직접 와닿는다. 하물며 ‘죽고 싶지 않았다’는 법원에서도 참작 사유다. 도구적 합리성은 고립 공포를 만나 구속력을 가진다. 특정 공동체가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할수록 강해진다.


아침 거리에 수많은 중학생이 지나가고 있다. 사춘기가 방문을 두드린 듯한 얼굴이 해맑게 웃으며 걸어간다. 옷차림을 보자 다들 하얀 셔츠를 입고 있다. 그중 무표정인 아이는 사뭇 다르다. 혼자만 스트라이프 무늬가 들어갔다. 땅 보며 무심히 걷는 주인에게 입혀진 스트라이프.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가? 눈에 확 들어온다. 개성. 획일화라는 세태에 ‘반대 획’을 그은 듯하다. 이번에는 빙의해 보자. 이제부터 저 아이다.


거리에 같은 학교 아이들이 지나가고 있다. 보니까 옆 반, 우리 반이다. 얘네들 옷과 내 옷을 번갈아 본다. 미처 빨지 못한 나머지 형 교복 셔츠를 빌려 입었다. 홍조가 얼굴을 덮는다. 셔츠 끝 단은 손 김 때문에 주름 잡힌다. 혹여 교문에서 무어라 하지는 않을까. 내 친구가 보면 어떡하지. 걱정이다.


획일화를 가로지었던 스트라이프는 이 아이에게 ‘마킹’으로 느껴진다. 전자와 후자는 정체성이 다르다. 전자는 나와 관련 없는 중학생 아무개. 후자는 중학생인 ‘나’이다. 고립은 후자처럼 두렵다. 중학생인 ‘나’로서는 선택이 하나밖에 없다. 똑같아지기.


대리자적 상태

고립 공포로 자리 잡은 도구적 합리성은 대리자적 상태를 만나 발현된다. ‘시켜서 그랬다’. 수많은 부조리와 악·폐습에서 들리는 말. 타인에 의탁된 자아는 특정 지시에 순응한다. 결국 스스로를 동물로 전락시킨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었던 자유의지에 반한다. 시켜서 그랬다면, 내부 고발과 반성도 누가 시켜서 그랬던가. 인간은 스스로를 반추하고 되새겨 고칠 수 있다. 공감이 작용한다면 더 그렇다.


밀그램 실험과 로트문드로 알 수 있다. 밀그램 실험에서 고통이 더 가깝고 선명할수록 부당한 지시는 거부되었다. 반유대 정책을 직접 지시한 로트문드는 현장에서 마음을 바꾸어 유대인 입국을 허가한다. 생각을 다시 잡는 ‘전환적 만남’이 필요하다. 그러나 녹록지 않다. 고립 공포는 우리를 가두어 공동체 울타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탄생하는 왕따와 따돌림. 직접 ‘너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라는 예상. 도덕적 상상력이 철저하게 배제된다. 분명 딱하다. 아파 보인다. 양심이 쿡쿡 찔린다. 그런데 행동하지 않는다.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이 도덕적 상상력을 만난다면 평범한 사람도 나서서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양심은 ‘사회성’에 가로막힌다.




우리는 지금

무뎌진 양심은 비공감으로 이어져, 소시오패스를 양산한다. 극단으로 치달을 때 전쟁은 시작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째. 아직 러시아 국민은 푸틴을 옹호한다. 푸틴은 히틀러와 비슷한 프로파간다를 벌인다. 정치를 예술화하여 웅장히 과시하는 동시에 적을 악랄하게 그린다. 이를 그대로 믿는 러시아 국민들. 분명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사회로부터 고립될 뿐만 아니라, 무력에 의해 물리적으로도 고립된다. 결국 거부의 메커니즘이 쉽게 작동되지 않는다. 타지로 가는 수밖에. 러시아를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은 다른 나라에서 관련 활동을 벌인다.


한국은 안심일까? 체제에 순응한 채,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대응할 뿐. 언뜻 생각해 보아도 예시를 떠올릴 수 있다. 지금은 힘이 빠졌지만, 한때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거리 속 ‘노마스크족’을 우리는 어떻게 대했던가. 인상 쓰며 찌릿. 눈치를 주는가 하면 심지어 커뮤니티에 ‘박제’한다. 더 과거,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유니클로에 들어가는 행인을 찍어 사진을 올렸다. 댓글은 ‘개돼지’라느니 가관이다. 아예 최근에는 무인점포에서 무전취식한 초등학생 사진을 박제한 사건이 있었다. 기술 발전은 도구적 합리성 내면화를 촉진한다. 이전 눈짓과 헛기침은 사진으로 변모했다.


“MZ세대는 말이야…”. 그놈의 MZ. 경제활동인구를 포괄하기 때문에 세대 구분 능력을 상실한 단어. 그런데도 사용되는 이유는 낙인 때문이다. 이 단어는 방조자를 양성한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80년대생과 2000년대생을 묶는 이 단어를 사회는 20대에게 한정해 사용한다. 관습에 따르지 않는 20대를 주로 지칭한다. 고착된 규율을 거부한다면 곧 반항아이자, 돌려 말하면 MZ다. 그러나 어느 세대나 외골수는 있었다. 주변에도 ‘나는 그냥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MZ라고 불린다.’라는 말이 들린다. 경고장 기능. ‘낙인’을 부여받지 않기 위해, 20대는 부조리에 의문을 품지 않고 얌전히 따르게 된다.


눈치를 주고 따르지 않으면 라벨을 붙인다. 그러니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지 못한다. 억하심정을 풀 곳은 상상과 대리 만족뿐. 사적 제재 소재 콘텐츠가 범람한다. <모범택시>, <더글로리>, <일타 스캔들>…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대신 복수해 주고,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직접 복수하고, 선망했던 선생님을 위해 몰래 복수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다.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말하면 땜질에 그친다.


학교폭력 기록을 대입에 반영한다고 한다. 학교폭력 근절보다는 ‘대응’에 가깝다. 대입 시스템 유지는 덤이다. 결국 기존 시스템은 유지된다. 오히려 공신력 없는 학교폭력위원회에 권위를 부여하고 만다. 새로운 체제를 이용하는 이는 반드시 등장할 것이다. 이슈가 되면 눈 가리고 아웅할 테다. 이 울타리에 순응하지 않으면 부적응자이자 실패자다.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낙오자’로 분류되는 것처럼.




권위에 의한 결속, 정체성 속박은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진다. 이제 외국에 가더라도 그 사회는 당신을 바라본다. 이름과 나이는 물론, 성정체성과 종교같이 민감한 정보까지 알 수 있다. 이제 내부 고발 같은 ‘반항’은 힘들어진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 공감과 협력 학습, 미래지향적 보도, 내부고발자 안전망 등이 필요하다. 이것이 갖추어질 때 ‘반항’은 이제 ‘회복’이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고 치유하는 행위는 아프지만 다시 신선한 바람을 예보한다. 세 잎 클로버 세상에서 네 잎 클로버는 부적응자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네 잎 클로버가 가져올 행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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