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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혁 Apr 12. 2022

평창의 경희

두번째 봉사활동

광일이네 가족을 방문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나면서 잠시 혼란에 빠졌던 마음은 진정되어갔다. 나는 봉사자가 될 생각을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부여하는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친구들과 과천과학관에서 창문을 벅벅 닦아댄 것 말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봉사라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 그것에 대해 고민해보는 찰나의 시간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회복지의 대상자였고 자원봉사자의 상대자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모르겠다고 언론에서 말하는 대한민국의 사회보장시스템. 선별 급식제도와 같은 그 고장난 사회보장시스템의 썩은 동앗줄이라도 붙잡고 표준치 인구의 반열에 오른 거면 내가 그래도 웬만한 자원봉사자 이상의 사회적 역할은 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러했다. 내 작품은 아카데미에 이름이 오르내리거나 크게 흥행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아는 모든 분들은 작게 이뤄논 그 사실만을 가지고도 대견해했다.


"우리 혁이 잘컸네."

"정말 수고했다. 내가 다 고맙다."

"그래 이렇게만 살아. 우리는 더 바랄게 없어.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장하다. 우리 진혁이."


 하지만 내 스스로 자랑스러워 할 것은 없었다. 소라게가 본능적으로 더 나은 껍질을 찾듯 내가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었다. 우리 사회를 위한다는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총아였다. 그런데 한살배기 광일이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빈틈을 헤집고 들어왔다. 이제 여유가 생겨서 광일이 같은 사례를 돕는데 응해보니 이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와중에 떨어져나가는 사람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한 상념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중에 두 번째 파도가 나를 덥쳤다.



“영상 편집을 하려면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게 좋죠? 저는 베가스를 쓰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나랑 비슷한 또래였던 이영고 과장은 국내 아동복지기관인 하트하트재단에서 멀티미디어 자료를 총괄하시는 분이었다. 어떤 크고 작은 기관이든 멀티미디어 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다. 기관들에게는 재앙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모든 것이 훨씬 명확했다. 기관장과 이사들이 식사를 하러 다니면서 유력인사들로부터 기부금을 충당하면 직원들은 그것을 교부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소임을 다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활동에는 변수가 없었다. 그러나 2006년 스티브잡스의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이 다분히 점잖게 굴러가던 어른들의 세계를 모두 헤집어 놓았다.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고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다는 것은 개인들에게는 무한한 기회이기도 했다. 내 또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스타크래프트로 컴퓨터를 배운 이영고 과장은 그러한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부류였다. 직장에서의 위치는 사회초년생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잠재력은 기존의 한자 섞인 보고서를 대신하여 미래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될 그런 것이었다. 그는 그런 변화의 흐름들을 놓치지 않았고 넘쳐나는 자신감과 뜨거운 열정은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저는 어도비 프리미어를 사용합니다."

"아 베가스는 별론가요?"

"아닙니다. 베가스가 별로라기보다는 프리미어가 확장성이 뛰어나서요. 그래도 일반적인 용도로 쓰시기에는 충분하실거에요."

"재단에서 쓸 영상을 제작하는데에도 문제가 없을까요?"

"네 그럼요. 사실 저도 다른 감독님들한테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잘 볼 줄 모른다고 욕을 꽤 먹었어요."

"뭐 때문에요?"

"프리미어를 쓴다고요. 영화진흥위원회 후반 지원 사업 때문에 한 50명의 감독이 모인 일이 있는데 프리미어 형식으로 원본을 제출한 사람은 저 밖에 없더라고요. 영상 한다는 사람들은 다 애플 제품 쓰거든요."

"그럼 애플 제품 쓰시지 왜 프리미어를 사용하세요?"


"아.. 그건.."



 이영고 과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대화 주제였을텐데 지금까지 숨겨왔던 감정을 또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영고 과장은 의도한 것이 아니었겠지만 나는 가슴이 아렸다. 스티브 잡스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와는 별개로 나는 내가 애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감독이 영화제 뒤풀이에서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윈도우 쓰세요? 그걸로 작업이 돼요?"


"네 저번 왕십리 CGV에서 시사회 할때도 별 문제 없던데요."


"에이 그거 편집피디가 맥으로 출력해서 뽑았을거에요."


"아닙니다. 제가 직접 편집했습니다."


"편집 안맡기시고 감독님이 직접 편집하셨다요? 감독은 그런거 하는거 아니에요. 감독은 기술자가 아니에요. 내용에 신경을 쓰셔야지 테크닉에 시간 쓰시면 안되죠."



 진짜 전문가들은 다 맥을 쓴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품을 사서 직접 조립한 75만원짜리 컴퓨터로 할 수 있는 편집을 매킨토시로 하려면 대여섯배는 더 들었다. 언박싱 감성이라던지 예술적 마감이라는 것들은 나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도 아이폰 써보고 싶었는데.'



 나는 애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애플 제품으로부터 받았던 박탈감이 힘들었던 것이다. 어느 장소에 얼마나 많은 양의 상처를 내가 감춰두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 꺼내어 직시하고 싶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억압된 상처가 날 날선 사람으로 만들어 누군가를 은연 중에 찌르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얻어맞을 여유가 있을 때 스스로 설득해 왜곡되었감정을 편평하게 펴낼 필요가 있었다.




"아 그런 그렇고 감독님 부탁드릴 사례가 하나 더 있는데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이번에는 뇌종양을 앓고 있는 소녀의 사연이었다. 이영고 과장으로부터 전후사정을 청취하고 나는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다. 13살 경희는 유일한 보호자인 어머니와 함께 진료실 앞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늘 후원캠페인 관련해서 도움을 드리러 온 이진혁이라고 합니다. 이영고 선생님으로부터 얘기는 들으셨는지요."


"네 그럼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앉으시죠."


"아 괜찮습니다. 병원에서 대기하고 계시는 모습도 담아놓으면 좋아서요."



 경희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는 딸을 둔 어머니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나를 밝게 맞이해주셨다. 하지만 그 모습이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얼마나 많은 복지기관 관계자들을 만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현장을 두 번째 방문하는 나보다 어머니가 훨씬 더 이런 만남에 익숙하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옆에 앉아있는 경희를 보니 어머니와는 대조적으로 기운없이 앉아있었다.


"안녕 경희야."


"네.. 안녕..하세요."



 경희는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었다. 소녀는 종양으로 인한 뇌손상이 너무 심해서 이미 신체의 기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지가 못했다.



"경희가 2007년에 뇌수막종으로 뇌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요. 그러고 나서 2010년도에 신경증상, 얼굴이 실룩거리는 신경계 증상이 있어서 MRI를 다시 찍어보니 다른 악성종양이 재발하여 그것에 대해서 수술을 하였고요. 수술 후에도 종양이 남아있는 부분이 있어서 감마나이프 서저리라는 방사선 치료를 하고 지금은 항암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김수리 교수는 경희의 현재 상태를 설명해달라는 내 질문에 적극적으로 설명을 하고 나섰다. 경희가 재발한 것이 스스로도 상당히 안됐던 모양이었다. 의사들은 수많은 환자를 보지만 소아암은 보통 백혈병으로 나타나고 뇌종양에서는 이렇게 어린 환자인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나고 우리는 평창으로 출발했다. 경희네 집이 평창이었다. 대부분의 지방이 그렇듯이 이렇게 큰 병은 서울에서 밖에 치료 못한다고 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삐쩍 마른 아이가 사방이 열려있는 플랫폼에서 오들오들떨고 있는 모습 자체만으로도 안쓰러운데 아픈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성인도 서울에서 평창까지 왕복으로 오고가면 진이 빠지는데 경희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정이다.



"당일치기로 서울을 다녀가시려면 새벽같이 준비하셨겠어요. 어머니."

"네 교수님 외래보시는 날은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해요."

"치료도 치료지만 이동하느라 힘이 다 빠지시겠어요."

"하루 자고가면 경희도 좀 편할텐데 그럼 또 모텔비가 나가니까.."


어머니는 몇발치 떨어져있는 경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휴 자가용이라도 있으면 좀 나았을텐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어머니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시겠지 싶어 괜히 나에게 애플생각이 그러한 것처럼 어머니를 비참하게 만드는 단서일까봐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무궁화호가 도착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어머니는 차창 옷걸이에 수액을 걸고 반대쪽 끝을 경희 몸에 놓았다.


 "어머니 이게 무슨 수액이에요?"

 "경희 밥이에요."


자세히 보니 파우치에 든 것은 액체이라기 보다는 황갈색을 띈 유동식으로 보였다.


 "위로 바로 넣어서 먹여요."



경희는 배에 호스를 꽂은 채로 가는 내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역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더 버스를 타고 들어간 뒤 무슨 도심지에 이런게 있나 싶을 정도의 가파른 절벽 옆에 따라 놓인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빨간 바탕에 흰글씨가 써져있는 간판이 나타났다.



'신궁선녀 보살.'



 이영고 과장은 출발하기 전 어머니의 직업적 특성 때문에 경희가 처음 아팠을 때 현대의학보다는 민간요법에 많이 의존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경희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경희를 임신하고 신내림을 받아 집을 온통 부적으로 꾸몄다고 한다. 그즈음 남편과도 이별한 듯 했다. 거실이 한개 있고 방은 2개 였는데 그 중 하나의 방은 각종 기물과 부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때는 팔자같은 것을 봐주는 공간으로 쓰였을 듯 싶으나 지금 상태를 봐서는 마지막으로 사용된지 꽤 시간이 흐른 듯 싶었다.



 "어머니 이제 일은 못하시나 봐요."

 "일해야 되는데.. 재발한 뒤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요."


 거실에서는 어머니가 생활하고 나머지 방 하나가 경희 방이었다. 경희가 털모자를 벗자 한올의 머리카락도 없는 민 머리가 나타났다. 병원에서부터 한번도 벗지 않고 계속 쓰고 있던 것이었다. 경희는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부터 켰다. 모니터 속에는 선생님이 있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경희를 위해 온라인 수업이 제공되었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단 한명의 아이를 위한 수업임에도 대충하는 법이 없으셨고 경희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간절해 보였다. 그렇게 열정적인 수업이 끝나갈 무렵 모니터 뒤에서 또 한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경희야 나 수정이야 나 니랑 헤어지기 싫어! 학교가서도 못봐."


경희는 삐뚤어진 입으로 힙겹게 말문을 열었다.


'건강,,해..지면..다시.. 보자."



처음으로 보는 경희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네이버 해피빈에서 3달 간 진행된 경희양을 위한 온라인 모금 캠페인을 통해 700만원의 후원금이 모여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국민들의 성원이 야속하게도 경희양은 1년 간만 더 이 세상에 머물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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