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주방 아줌마였다.
2004년 봄, 운명처럼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이 각자가 하던 일을 그만두게 돼, 우리 부부는 시댁 식구들과 횟집을 차려 동업하게 되었다. 집안의 막내였던 남편은 새벽에 인천으로 물건을 구매하러 가야 했고 나는 반찬가게를 한 경험으로 주방일을 도맡아야 했다. 운명인 줄 알고 시작한 동업이 우리에게는 지옥이 되는 순간이었다.
창업자금을 똑같이 부담했지만, 남편은 직원이고 나는 주방 아줌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운동하다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쉬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남편에게 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물며 아내인 나마저도 다친 남편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난 울며불며 남편에게 형과 누나에게 화를 낼 것을 요구했지만 큰 소리 나는 것을 원치 않는 남편은 아픔을 참으며 묵묵히 일했다. 그런 남편의 행동으로 난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주방 아줌마인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았다.
2. 천덕꾸러기 아들
그 당시 7살이던 아들은 새벽 2까지 장사를 하는 우리로 인해 함께 일하는 작은 시누 조카들이 돌봐주었다. 하지만 사촌 형이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자 어린 아들이 조카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작은 시누는 더는 봐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린 아들을 돌보기 위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니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며 안된다고 했다. 피눈물이 나고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 말 않는 남편과 시댁 식구들로 인해 어린 아들을 가게에서 재워야 했다.
유치원이 끝나고 나면 가게에 있을 곳이 없어 동네 여기저기 다니며 놀다 늦은 저녁을 먹이고 씻기지도 못한 채 구석진 곳에서 재워야 했고 행여 단체 손님이 들어오는 날이면 시누의 잔소리를 들으며 잠자리를 옮겨야 했다.
돈이 부족해 시작한 동업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천덕꾸러기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3. 참았던 화가 폭발하다.
가게에 손님이 많았던 어느 날 저녁을 먹지 못해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게 됐다. 7살 된 아들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김밥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고 시누는
“아우, 누굴 닮아 자기만 생각하는 거야”라며 아들을 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참았던 화가 폭발해 시누에게 덤벼들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요!!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러겠어요!!”
라고 소리치며 아들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그동안 참아왔던 남편도 “화를 내려거든 나한테 내!!! 얘가 무슨 잘못이 있어!”라며 소리를 질렀다. 가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너 지금 누구한테 큰소리치는 거야”라며 시누도 소리치자 남편은 어디서 못돼먹은 버릇을 배운 거냐며 아들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는 아들을 더욱더 세게 끌어안았다. 남편과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화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4. 살아낸 자격증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안 좋았던 사이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작은 아주버님 내외와 작은 시누 내외는 우리 부부를 따돌리며 자주 놀러 다녔고 쉬는 날이면 저녁도 같이 먹었다. 힘든 나날이었지만 버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나 사용법을 터득한 듯싶다.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부당함에 저항하며 열심히 일했다.
작은 아주버님이 먼저 분가를 원해 작은 시누와 반반의 자금을 만들어 투자금을 돌려 드렸고 급기야 고모부님도 자신만의 사업을 원해 전세 보증금을 빼 월세로 돌린 뒤 투자금을 다 갚았다. 내 소원이며 꿈이었던 우리만의 가게를 갖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서로가 힘든 시간이었고 인고의 시간이었다. 나 혼자만 피해자가 아닌 한 공간에서 일했던 모두가 피해자였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살아낸 자격증’을 주고 싶다. 4년간의 동업이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임을 알기에 살아낸 자격증을 부여하고 싶다.
5. 또 다른 도전
4년간의 동업을 끝으로 우리만의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유행한 비브리오 패혈증으로 횟집들의 매출은 감소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나는 업종 전환을 하자고 했지만,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남편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편은 3개월 고민한 끝에 아르헨티나 수입 곱창 전문점으로 업종을 변경하자고 했다. 나는 지방임을 고려해 한우 곱창은 반드시 메뉴에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시댁 식구와의 동업으로 생겨난 나의 자아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잘 나가던 횟집이 곱창집으로 업종을 전환했다는 소식에 많은 손님이 찾아와 한 마디씩 던지고 갔다. 곧 망할 거라고! 우리 부부는 손님들의 야유 속에서도 자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한우 곱창은 물론 가족 손님들을 유치하기 위해 돼지갈비도 팔았다. 자리를 잡기 위해 무식하게 일만 했다.
힘들게 지켜낸 가게를 잃고 싶지 않았다.
6. 남편의 눈물
소원이었던 우리만의 가게를 갖고 열심히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곱창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팔아서인지 오픈 3개월 만에 매출은 급속히 감소했다. 손님들의 야유와 주변 지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가게를 처분하기를 바랐던 내 말을 들은 남편은 나와 싸우기 싫어 부동산에 가게를 내놓았다. 가게를 처분하기로 한 하루 만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계약자가 있으니 내일 당장 계약서를 쓰자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마음먹은 대로 가게를 처분하기로 했다.
가게 계약 한 시간을 남겨두고 남편은 울면서 한 번만 자기를 믿어달라며 계약을 파기하자고 했다. 가 계약금을 걸어놓지 않은 상황이어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하며 애원했다. 남편의 눈물에 깜짝 놀란 나는 다시 한번 기운 내기로 마음먹었다.
7. 9,900 원 전략
우리와 계약하려던 사람에게는 곱창 거래처 사장님 가게를 소개해 주고 남편은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가게 이름도 바꾸고 기존에 있던 수입 곱창을 전면 폐기하고 횡성 한우 곱창만을 취급하기로 했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 팔았던 돼지갈비도 미련 없이 버렸다. 한우 곱창에 어울리는 밑반찬을 만들고 영업을 다시 개시했다.
9,900원의 마케팅 전략을 도입해 다른 가게와 차별화를 두었다. 명품 한우 곱창을 저렴하게 팔다 보니 처음에는 의심하던 손님들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윤을 생각하기보다 본질에 충실해서인지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면서 우리를 견제하는 업체로부터 신고를 당해 식품안전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원산지를 속여 장사한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것이었다. 횡성 한우의 원산지 표기를 확실히 해두었지만, 김치에 들어가는 고춧가루의 원산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가장 가벼운 벌금을 내야 했다.
8. 새로운 도전 2호점
입소문을 시작으로 가게는 빠르게 안정화되었다. 직원의 수도 많아졌지만 일의 강도와 주변의 편견으로 오래 근무하지 않았다. 직원들의 이직을 막기 위해 우리는 고민 끝에 5년을 근무하면 분점을 내주겠다는 경영이념을 필두로 직원을 모집했다. 5년의 근무를 채우면 본점이 창업 비용을 모두 감당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우리 가게에서 오랫동안 일해오던 딸 같은 중국 아가씨가 한국인과 결혼하며 남편과 함께 장사를 배우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다. 계획보다 빠른 임신으로 아내가 가게를 그만두자 남편도 그만두려고 했다. 설득 끝에 5년의 근무 조건을 1년을 남겨둔 시점에서 분점을 내주었다. 그들은 본인들만의 가게를 갖기를 원했다. 본점에서 창업 비용을 대주면 간섭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전혀 그럴 뜻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뜻에 따라 모자란 금액만 투자하기로 했다.
9. 불안감으로 시작된 새우잠
분점인 2호점이 오픈하고 얼마 뒤 ‘나 혼자 산다’의 TV 프로그램에서 마마무 ‘화사’의 곱창 먹방이 방영되며 한우 곱창을 먹지 않았던 젊은 층들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곱창의 품절 대란 현상을 낳고 가격 폭등까지 불러일으켰다. 2호점 점주도 젊은 사장으로 손님들과의 소통도 잘 되었고 매출도 빠르게 상승했다. 어떤 이들은 2호점이 본점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2호점의 매출이 본점과 비슷해지면서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본점은 3호점을 오픈해 승승장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코로나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위기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 식당은 3호점 오픈을 계기로 거칠 것이 없어 보였지만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힘든 나날이었다.
하루도 편하게 잠들 수 없었다.
10. 코로나바이러스로 알게 된 온라인 세상
힘든 시기에 2개의 직영점을 운영하는 본점과 달리 2호점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본점과 비교해 직원의 수도 많지 않았고 젊은 세대가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 다행히 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본점이 3호점 운영으로 손님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2호점이 본점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나는 치고 올라오는 2호점을 신경 쓰며 다시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지역이 다르면 신경 쓰지 않을 일을 한 지역에 3개 분점이 영업하고 있어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을까? 함께 성장해 나가야 하는데 왜 2호점을 견제할까? 우리 본점은 뭘 해야 하나?’란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 MKYU 김미경 학장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답은 그 안에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11. 꿈의 경제학, 새로운 꿈을 꾸다.
강연의 내용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으로 디지털 세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본점의 기반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을 때 뜻밖의 답을 찾게 된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이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지며 어려움을 겪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며 대면으로 이뤄졌던 많은 업무가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온라인 세상으로 빠르게 전환되어 갔다. 기업들은 온라인으로 이주하며 밀키트 사업을 주도했고, 디지털 격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맥도널드, 버거킹 같은 대형 브랜드들도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으며 디지털 세상에 빠르게 진입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느끼며 나도 우리 본점을 온라인으로 이주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불안해하기보다는 해답을 찾기 위해 온라인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온라인 건물주가 되기 위한 새로운 꿈이 시작된 것이다.
12. 꿈을 찾기 위한 방황
온라인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며 꿈에 부푼 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지인들은 다 늙어 무슨 공부를 하느냐며 그냥 하던 대로 살라고 했다. 용기를 주지 못할망정 나를 끌어내리며 핀잔을 주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난 블로그 1일 1 포스팅을 함께하는 ‘같이 가치 챌린지’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온라인에 건물을 쌓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알아야 할 게 많아졌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본 남편은 나의 꿈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됐다. 한 가지라도 이루라고 하면서.
‘꿈이란 어제보다 더 나은 나로 성장시키는 것’이란 말처럼 꿈이 삶의 종목이 되면 반드시 열등감과도 만나게 된다고 했다. 꿈이 없다면 이런 감정들과 만날 수 없다고도 했다. 경험을 거쳐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난 내 꿈에 멘토가 되기로 했다.
13. 내 꿈에 멘토
“꿈에는 명령체계가 있어요. 머리는 내 꿈의 기획부이고, 실행하는 부서가 따로 있죠. 그런데 이 꿈의 멘토는 ‘나 자신’이어야 해요. 누가 억지로 시키면 절대로 해낼 수 없죠. 꿈에 대한 명령은 ‘나’로부터 나와야 해요. 그렇다면 할수록 힘 나고, 좋아하는 일만 꿈일까요? 모든 꿈은 내가 하기 좋은 것이 30%이고 하기 싫어서 미칠 것 같은 게 70%입니다. 꿈은 성분 자체가 그래요. 그래서 극기하고 인내하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다 보면 하기 싫고 그만두고 싶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럴 때마다 내 꿈의 멘토인 내가 잘해야죠. 명령을 내리고 실행을 하고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꿈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출처:김미경의 성공 습관 따라 하기)
꿈이란, 뭘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는지, 나의 다양한 가치를 찾기 위해 내가 내 꿈에 멘토가 되어 나를 만들고 명령을 내려 실행으로 옮겨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14. 나는 나의 빅팬이다.
나의 새로운 꿈은 디지털 세상에서 적응하고 이주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이룬 꿈보다 거대하고 어려워 방황하고 있지만, 주위 사람들이 아닌 나에게 질문하며 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새로움을 대면했을 때 감정이 허락을 못 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한다. 나의 공부가 남편과 지인들에겐 새로움으로 다가가 공부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온라인에서의 공부가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좌절, 낙담, 핑계를 인생 끝까지 가져가는 게 아니라 호기심, 희망, 공부, 반복적인 행동을 하며 여태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라는 깨달음의 기회를 만나 나를 끌어내리려는 모든 것들과 싸울 것이다.
나의 가치를 찾기 위해 나를 응원하며 나 스스로 평생 팬이 되겠다는 탄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