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생선 장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운명이었을까? 때마침 작은형과 작은 누나도 새로운 직업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점을 알아보았다. 삼 남매가 아무리 힘을 모으더라고 서울과 경기권에서는 가게 보증금과 시설비 외에 가게 터에 붙는 권리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리는 연고지가 있는 강원도를 알아보았다. 강원도는 가게 보증금과 시설비만으로도 가게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가게 터에 대한 권리금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시장조사를 다녔다.
운명이었다! 몇 번의 시장조사로 지금의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4개월간의 생선장사 자리를 보러 다닌 경험으로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횟집을 할 것인가?, 생선구이를 팔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작은 형님은 생선구이를, 난 둘 다 하기를 원했다. 다행히 다른 식구들도 횟집과 생선구이를 같이 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내가 주방을 맡고 아주버님과 남편이 회를 뜨기로 했다. 고모부님이 생선구이를, 작은 형님과 시누가 홀을 담당하기로 했다.
십시일반 돈을 모아 창업 비용 부담도 줄일 수 있었고 서로가 맡은 일에 집중해서 일을 하면 장사가 잘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음심점 장사의 경험 없이 시작한 거라 손발이 맞지 않아 주방은 주방데로 홀은 홀 데로 우왕좌왕하는 형국이었다. 게다가 낮에는 생선구이를 팔고 저녁에는 활어회를 주로 팔아 손님들도 헷갈려했다. 또한 삼 남매가 함께 운영을 해 각 가정의 생활비를 나누다 보니 금전적인 문제와 일의 강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등 좋은 점보다는 힘든 점이 훨씬 많았다. 남편만 설득하면 됐던 상황도 4명을 더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되니 힘에 부쳤다. 나보다 윗사람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장사를 했지만 매출은 점점 떨어졌다. 매출이 떨어지는 이유를 살펴보니 동네에 횟집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횟집이 생겼다고 매출이 떨어지다니!!
이유가 궁금해졌다. 혼자 고민만 하던 중 친정 언니들이 놀러 왔다. 이때다 싶어 친정 식구들과 경쟁업체에 가서 먹어봤다. 경쟁업체는 자잘한 밑반찬이 많이 나왔다. 그 반면 우리 가게의 밑반찬은 초라했다. 경쟁업체는 15가지 이상의 밑반찬이 나오는데 우리 가게는 꽁치와 빈대떡 등 달랑 대여섯 가지의 밑반찬만 내어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경쟁업체의 가게는 항상 손님이 많은데 우리 가게는 빈자리가 많았다. ㅠ
'대세를 따라야 매출도 올릴 수 있다' 란 생각에 남편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밑반찬 가짓수를 늘리자고~. 함께 경쟁업체에 가 먹어보고 어떻게 밑반찬이 나오고 회의 양이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해 보자고 했다. 남편은 경쟁업체에서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시댁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의견을 내세웠다. 하지만 나의 의견은 묵살됐고 시건방지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형제들 간의 갈등은 심해졌다.
그 이후 매출은 더욱더 하락했고 더 이상 동업의 관계를 유지하기에는 힘이 들어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어렵사리 돈을 끌어모아 투자금액을 돌려주었다. 횟집에는 우리 부부와 작은 시누만이 남게 되었다. 횟집의 분위기는 내 의견대로 대세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매출 상승과 함께 짜증도 상승했다.
[장사 비법 3]
벤치마킹을 하며 흐름을 파악하라.
잘되는 집을 찾아다니며 우리 가게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해야 한다.
그 당시 6살인 아들은 조카들이 보살펴줬다. 새벽 3시에 일을 마치고 잠이든 아들을 들춰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시누는 우리 아들이 조카들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더 이상 아들을 조카들에게 맡기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함께 같은 장소에서 같이 일을 하는데 6살 아이를 조카들에게 맡기지 말라니! ㅠ
아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남편과 시누랑 둘이 장사를 하라고 했다. 안된단다! 일도 하고 아들도 돌보라고 했다. 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ㅠ 더 황당한 건 남편도 누나와 생각이 같았다. 아들보다 식당의 일 할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 가슴이 찢어짐과 동시에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가게에서 재우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동네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고 밤 9시가 넘어서야 고픈 배를 채워주기 일쑤였다. 아들이 어리다고 해서 아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한 번은 동네에서 놀다 크게 다쳐 동네 어르신 손에 이끌려 가게로 찾아왔다. 어르신 왈 형들이랑 놀다 다쳤는데 뉘 집 애인지 몰라 수소문 끝에 데려왔노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범벅이 된 채 울고 있는 아들만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응급실까지 간지도 모르게 응급실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들을 지켜야 하는 엄마로 살아야 했다.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당함에 대응하고 권리를 찾으려고 했다. 시누와의 사이는 점점 악화돼 함께 일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투자금액을 다 돌려주고 온전하게 가게를 인수했다.
6년간의 시댁 식구와 동업을 하며 항상 생각했다. 우리만의 가게를 갖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최대한 돈을 모으기 시작하며 때를 기다렸다. 레시피를 연구하며 희망을 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독립을 꿈꾸며 되뇌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나니 우리는 독립할 수 있었다.
[장사 비법 4]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끊임없이 되뇌어라.
그리고 여유자금을 모아라.
창업자금만 가지고는 장사에 몰입할 수없다.
처음으로 우리만의 가게를 갖고 영업을 시작했다. 장사는 날로 번창하고 집도 이사해 아이도 안정되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