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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편 Apr 16. 2022

NATURES MORTES

안네 임호프(Anne Imhof)



시체


물질 과잉의 시대를 지나, 모든 물질이 무형의 것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대에 젊은 예술가들의 기저에는 깊은 탄식이 자리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과잉화되어 형상이 없어진 유령으로 액자의 틀을 넘어서 현실 안에 실재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애써 상기시켜야 할 상징이 아닌, 내 주위를 맴도는 현재로 변모한다. 어찌 보면 정물화와 같은; 무한 루핑 하고 있기에 거의 멈춰있는 듯 보이는 현실의 상태에 대한 예술적 증언들은 시체 위를 끊임없이 빙빙 돌고 있는 파리들과 같다. 파리와 같아진 예술가들이 그려내는 나선의 궤적은 빛을 생성해내기 위한 역동의 순환보다는 빠져나올 길 없어 보이는 뫼비우스의 띠의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가망 없어 보이는 새로움과 희망 없어 보이는 삶의 나선에서 무엇인가를 찾아 항해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되풀이되는 반복적인 예술적 실천들은 이미 모두에게 충분한 피곤함을 제공해준다. 무력한 궤도를 따라 비통하게 시체 위를 비행하는 파리들에게서 생에 대한 욕망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은, 현대의 예술가들이 가지는 숙명과 무력감을 동시에 표현해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1년 Palais de Tokyo에서 열린 Anne Imhof의 <NATURES MORTES>는 어떤 의미로 현대의 예술가가 성취해야 할 무엇을 가장 시기적절하게 그리고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이뤄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언


NATURES MORTES는 전시의 직접적인 제목과도 같이 예술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Marx가 존재하지 않던 공산당을 선언했던 것과 같이 Imhof는 전시를 통하여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선제적 선언을 감행한다. 분명 선언이라는 형식은 현대 예술에 익숙한 포맷은 아니다. 뚜렷한 선언보다는 불명료한 질문이 실험이라는 명목 하에 대부분의 작품을 지탱하는 것이 예술계의 트렌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선언과 질문 모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선언과 질문의 메커니즘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한다. 선언은 거대 담론의 형식과 유사하여, 자신의 논리를 활용하여 현상을 포획하고 설명한다. 반대로 질문은 포착된 현상들의 병렬이 만들어내는 어렴풋한 윤곽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진다. 종종 우리는 이 어렴풋한 윤곽을 '미래로 열린 가능성'이라는 부적합한 워딩을 통하여 이해하려 하지만, 이 어렴풋한 윤곽은 되려 과거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선언과 질문의 차이는 선제 타격과 대응 타격(카운터 펀치)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복싱에서의 카운터 펀치는 분명 주어진 현상의 벨로시티를 기반으로 플러스알파의 충격을 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하여 있지만, 동시에 주도권의 완전한 부재를 전제한다. 카운터 펀치는 이미 뻗어 나온 펀치만을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을 뿐이다. 반면에 선언은 언제나 사태에 대한 완전한 주도권을 가져가는 데서 시작한다. 카운터 펀치의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뻗어내는 이 선제적 펀치 안에는 용감한 선언의 에너지가 깃들어있다. 현대 예술에는 분명히 이 구닥다리식 선언이 부재한다. 무책임한 점유, 노골적인 강요, 그리고 자유에 대한 통제로 이루어지는 피학적 불편함은 분명 많은 작가가 선택하는 노선은 아니다. Imhof는 선언이 가져다주는 이 주도권을 작업의 전면에 등장시키며 파리가 그려내는 시체 위의 나선에서 스스로를 탈락시킨다.




마법진


NATURES MORTES의 선언은 모두가 윤곽을 그려내기 위해 애쓰는 현대의 유령을 강제로 출두시킨다. Palais de Tokyo는 18시부터 22시까지 숨겨진 무형의 무엇인가가 등장할 대단히 특수한 그리고 임시적인 (마치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그려지는 마법진과 같은) 구역(zone)으로 기능한다. 이 마법진 안에서 일상적인 사물과 친숙했던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들은 기존의 맥락에서 떼어진 채, 오직 소환시키고자 하는 대상을 향한 반-강제적인 선언에 입각하여 재구성된다. 공간은 Imhof가 활성화시키기 위한 마법진으로, 작품들은 의식을 이끌어가기 위한 제물들로, 그리고 퍼포먼서와 관객들은 의식에 참여하는 오컬트적인 신도들로 변모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Imhof의 전시는 일상의 연장보다는 일상의 단절에 가깝다. 마법진은 이 단절을 외치는 선언에 의해 생성되며, 목적을 위해 강력하게 상정된 공간, 의식을 위해 마련된 작품들, 참여를 위해 응집한 대중들은 역설적으로 Imhof가 만들어낸 불편한 규약 아래에서 오히려 자유롭게 관계한다. "자발적이며 욕망되는 치료적 과정"이라고 Jean-Michel Oughourlian이 엑소시즘(exorcism)의 대치 격인 아도시즘(adorcism)을 정의하듯, Imhof의 전시 내에서의 수상한 의식이라 불릴 수 있는 퍼포먼스는 분명 일반적인 오컬트 통념과는 반대되는 긍정성을 내비친다. 그렇기에 Palais de Tokyo는 Imhof가 진행시키는 불길한 의식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체들을 모아놓은 으스스한 보관소가 아닌, 되려 (살아있는) 무형의 무엇을 출두시키기 위해 구역 안에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발전하며 참여해야 할 생기 넘치는 의식의 장소로 기능한다.




FOMO


전시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분명 과거의 전시들과 다른 노선을 택하는 것이다. 관객은 NATURES MORTES라는 전시의 타이틀만을 마음속에 새긴 채, 자신의 눈앞에 일어날 모든 스펙터클에 대한 자발적인 그러나 대단히 피학적인 참여를 강요받는다. 기존의 전시가 멋들어진 텍스트 아래 고정되어 있는 작품들의 나열, 앞서 말한 무기력한 질문의 윤곽들을 특정 동선에 따라 향유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았다면, Imhof는 편안한 향유자의 위치에 있던 관객들을 갈망하고 추종하는 피-주도권자의 위치로 전락시킨다. 공간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이벤트들의 미궁(Labyrinth) 안에서 관객은 자신들의 고상한 미적 감각을 느긋하게 향유하기보다는,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연쇄적인 이벤트들에 대한 무기력한 그러나 동시에 노력하는 증인으로 존재한다. 전시 안에서 주어진 일련의 이벤트들은 관람을 위해 그저 그곳에 놓여있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취사선택을 강요하는 듯이 서로 분리되어있으며 숨겨져 있다. 결국 관객은 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과 같이 참여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온건한 현재를 비관한다. 아마 이러한 유별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 NATURES MORTES가 다른 전시들과 가장 구분되는 지점일 것이다. 가장 생생하지만 가장 무기력한 현재, 전시의 타이틀은 이러한 양가성을 지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운드


FOMO적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Imhof는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지며 변주되는, 이제는 Imhof의 시그니처가 된 디지털-오페라류의 사운드를 전면에 등장시킨다. Imhof의 지난 전시들이 대부분 고정되어있는 스피커를 통해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무대적인 사운드의 사용을 추구했다면, NATURES MORTES에서는 공간 전체를 지속해서 활성화할 수 있으면서도, 퍼포먼스가 특정한 동선 혹은 안무에 구속되지 않은 채 아무런 규약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도록 구축되었다. 이를 위하여 전시에서 사용된 대부분의 사운드는 반복될 수 있는 루프(loop), 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디제잉 기반의 트랜지션/전조(transition), 그리고 특정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고조시킬 수 있는 백그라운드 뮤직(BGM)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전시 공간의 한쪽에 조용히 은둔해 있는 사운드 엔지니어는 마치 퍼포먼스의 지휘자와 같이 실시간으로 사운드를 조작하며 Imhof가 추구하는 특정 분위기를 고취시킨다. 즉 이번 전시에서 Imhof의 사운드는 퍼포먼스에 종속된 완결된 사운드 파츠의 개념보다는 되려 퍼포먼스와 전시 자체의 맥락과 분위기를 유동적으로 규정하는 선언적 역할을 실행한다. 이는 Gernot Böhme가 지적하는 분위기와 일견 유사하다. Imhof가 만들어낸 사운드는 전체적인 구조에 종속적이지 않지만, 동시에 역으로 자신을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는, 말 그대로의 분위기 혹은 구조와 흡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이러한 사운드들은 Palais de Tokyo가 끊임없이 활성화될 수 있는 의식의 장소로 기능할 수 있게 도와줌과 동시에 퍼포먼스, 구조물, 그리고 작품들이 전시안에 내재한 현실적인 한계(동선, 작업의 수, 공간의 부피)를 넘어 현재 안에서 끊임없이 확장하고 교류할 수 있게 만든다. 즉 전시는 특정 동선을 통해 관람되어야 할 공간 안에 작품들이 아닌, Imhof의 사운드 시스템 안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의식(ritual)들의 총체와 유사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Imhof는 공간 안에 이미 온건하게 그리고 고정된 채 존재하는 작품들을 제한 시간 없이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뷔페식 전시와는 다르게, 관객들이 자신의 관람법 안에서 쉴 새 없이 즉흥연주(improv)를 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즉흥연주에 대한 감각은 관객들이 퍼포먼스와 동일한 현재성을 공유한다는 느낌을 부여하며, 참여에 대한 감각을 적극적으로 일깨운다. 그러므로 실제 관람객의 태도와 경험은 내부로의 관조와 사색의 영역에 머물기보다는, 외부로의 참여와 생생한 경험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움직이는 사운드


전시의 이러한 측면은 비교적 간단한 실천에서 성취되었다. Imhof는 여러 대의 블루투스 스피커를 활용하여, 스피커가 레일을 을 타고 이동하거나, 퍼포먼스들에 의해 옮겨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고안했다. 사운드가 전시의 구조적인 측면을 담당한다고 가정할 때, 움직이는 사운드의 등장은 전시 자체에 대단한 활력을 부여한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전시들이 성취하지 못한 지점이다. 단순한 시각에서 보자면 전시라는 형식 자체가 마치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같이 첫 번째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Imhof는 전시의 구조를 무형적인 것(사운드)에 맡김과 동시에 그 무형적인 것의 움직임을 유형적(스피커의 이동)으로 구현하는 것을 통해, 언제나 관념적인 영역에 맡겨져 있던 전시라는 형식에 몸체를 부여한다. 더 이상 전시는 시체와 기호들의 불길한 매립지가 아닌 유령의 현전을 감각할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장으로 기능한다. 이는 기존의 장소-특정적(site-specific) 혹은 기호-특정적이라 말할 수 있는 전시의 보편적 형식이 시점-특정적(moment-specific) 형식으로 넘어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장소/기호-> 시점으로의 전회는 동시대적인 예술의 특성임에는 분명하다. 비슷한 기간 파리의 Pinault Collection에서 열린 Urs Fischer의 전시에서도 유사한 시점-특정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에서는 비록 움직이는 사운드의 등장은 없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녹아내리는 양초로 제작된 거대 조형물들을 볼 수 있다. 관람객이 바라보는 특정 시간대에 종속된 유기적인 조형물의 현재성은 조형물이 설치된 현장에 대한 감각과 기호에 대한 인식보다 선행하는 생생한 현상적 체험을 제공한다. 즉 관객은 기존의 전시가 제공하는 납작한 영속적 공간성보다는 가변적인 전시의 시간성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부여받는다. 이는 현대의 많은 실시간 인터넷 방송이 대중에게 무엇을 어필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시간적인 소통 그리고 최소화된 반응과 반작용의 지연시간이 강조되는 인터넷 방송은 어떻게 참여라는 형식이 기존의 주류 방송과는 다르게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꼬깃꼬깃한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DJ에게 수줍게 건네던 이전 시절과는 다르게, 우리는 플랫폼과 동영상이라는 일종의 가상의 몸체를 얻은 '지금 내 앞에 실재하는 유령'과 소통한다.



빙의


Imhof의 퍼포먼스는 몸체를 얻은 유령과 흡사하다. 관객들에게 퍼포먼서는 유령과 빙의한 무당 혹은 신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퍼포먼서는 내 눈앞에 또렷하게 존재하지만, 건드릴 수 없는 무형의 존재와도 같다. 동시에 전시공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특정할 수 없는 분위기는 분명 퍼포먼서와 자신의 안에 생생하게 존재한다. Imhof가 자신의 회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과도 같이, 유형과 무형의 경계선은 어느새 대단히 흐릿해져 있다. 발렌시아가의 옷을 입고 Albrecht Dürer의 스케치를 사랑하는 힙스터의 역설과도 같이, Imhof의 작업 전반에는 언제나 결합된 양가적 몸체들이 포진해있다. 관람자와 광신도, 작품과 제물, 무한한 현재와 휘발하는 현재, 그리고 몸체와 유령과 같이 합일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두 개의 항은 Imhof가 만들어내는 마법 진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빙의한다. 빙의와 같은 영적인 이야기를 다른 맥락에서 바라볼 때, 최면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빙의는 최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속인이 시끄러운 음악과 화려한 움직임을 통해 암시성을 극대화하여 환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특정 행동을(빙의를) 유도하듯, Imhof의 퍼포먼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전시와 굿판이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그들 모두 무형의 무엇인가를 유형의 몸체 안에 소환시키며, 장소-특정성/기호-특정성을 넘어 시점-특정성으로 나아간다. 즉 현재에 대한 감각을 물질적인 매를 통하여 환기한다는 점에서, 둘의 형식은 대단히 흡사하다. 일상과 완전히 단절된 일시적인 가상현실 안에서 합일될 수 없는 두 개의 항은 경계선조차 사라진 채 양가적인 하나의 항으로 축소된다. 이것이 아마 예술이 언제나 말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아닐까?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글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예상하지 못하였지만, 어떤 의미로는 대단히 흡족스러운 결말이 아닐까 싶다. Imhof는 마치 "나에게 시체 대신에 차라리 좀비를 달라"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무덤 앞에서 조상에 대한 경건한 예를 갖추기보다는, 조상을 소환해버리는 발칙한 전시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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