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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편 Apr 16. 2022

언제나 돈이 문제다

저효율-고비용 예술

1.

언제나 돈이 문제다. '언제나'라는 강력한 단어는 말 그대로 정말로 강력하기 때문에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돈처럼 말이다. 아침에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조간신문의 경제란을 유유자적하게 훑어보는 것이 참다운 인간의 미덕이었던 시절은 분명 경제의 논리가 강력하게 작동하던 시대와 맞물려 있다. 종교든, 이성이든, 돈이든, 그밖에 무엇이든. 그 시대에 '언제나 문제인 것'을 관찰하는 것은 분명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돈에 미친 현대인들은 사실 가장 현대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마치 알파고처럼 읽어내는 주식 투자자들의 식견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꽤 오랜 기간 지속되어오던 '돈에 미쳐야 하는 사고방식'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록 자본은 불공평하지만 세상은 공평하다. 세상은 언제나 득과 실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는 투명한 거래를 제안한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돈이라는 물건은 "땅을 파면 돈이 나오냐?"라는 말과 같이 무(無)에서 자연 생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윤택하고 빠릿빠릿한 스마트폰 라이프가 바닷물을 착취하는 전기 에너지를 소비하며 공급되듯, 자본은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잔혹하지만 공정한 거래를 통해 만들어진다. 물론 노동력은 인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자원은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 변화의 바람은 자본과 교환되어야 할 이 두 가지가의 품목이 점진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불어오기 시작한다. 과거의 자본주의가 저비용-고효율의 체계로 이루어진 완전한 풍요와 가속적인 발전으로 대표될 수 있는 시대였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반대로 고비용-저효율의 체계로 이루어진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둔다. 노동자와 자원에 대한 착취로 대변되는 저효율-고비용에 반응하여 기업윤리와 노동자의 인권신장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어 왔으며, 이제는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만한 중국 또한 이로부터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한 듯 보인다.



2.

언제나 돈이 문제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변화의 바람은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예술가들은 앞선 주장에 어떤 동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고비용-저효율', 이 단어야 말로 스스로 쓰레기를 만들어낸다고 자학하는 예술가들의 창작행위를 대변해주는 말이 아닐까? 신세대 예술가로서 이러한 불온한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앞서 말한 고비용-저효율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좀 더 고찰해보고자 한다. 저효율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바라보자면, '비호환성'이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호환성은 분명 신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고 있는 답답한 녀석이다. 호환(互換)이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교환될 수 없는 특성은 생산과 소비의 흐름을 가속화하지 못한다. 즉 작은 맥락에서 보자면 비호환성이 가지는 저효율성과 확장 불가능성은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할인상품은 환불할 수 없거나 교환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쓸모없는 비호환성이 어떤 맥락에서든지 지속가능성과 결합되는 순간 가치는 급격하게 상승한다. 왜냐하면 비호환성의 쓸모없는 확장성 불가능성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수함으로 재포장되기 때문이다. 애플의 광고 'Think Different'와 같이 잡스는 정말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crazy ones, misfits, rebels, troublemakers, round pegs in the square holes와 같은 단어를 광고에서 사용하며 비호환성이 가지는 특수함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 비호환성은 수많은 천재들이 가진 찐(genuine) 특성이다, 그리고 잡스는 "이 특성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달콤 쌉싸름한 제안을 속삭인다. 재미있는 점은 광고가 비호환성의 미학을 강조하며 '현상유지(status quo)에 만족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찬가를 부르지만, 동시에 애플이 가지는 비호환성은 소비자를 애플 생태계 안에 현상 유지시키기 위한 경제적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애플이 차용하는 기업의 이미지는 고비용-저효율의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지만, 소비자 풀(pool)의 현상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저비용-고효율에 가장 적합한 기업의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하다.



3.

언제나 돈이 문제다. 현대를 지배하는 모든 것은 호환된다. 애플의 씁쓸한 예시가 어쨌든 고비용-저효율의 미학을 설파한다면, 반대로 힙합은 저비용-고효율의 미학을 설파한다. 힙합은 자본과 같이 무한한 확장성과 착취를 대표한다. 힙합의 중추를 이루는 샘플링(sampling) 기법은 과거의 음악들을 존중되고 보존되어야 할 기념비들이 아닌 파헤쳐져야 할 광산으로 취급한다. 힙합은 비트코인과 같이 샘플링의 광산에 숨겨져 있는 비물질적 금덩어리들을 채굴하고 파헤치며, 샘플링이 완료된 트랙들은 특정한 리듬에 몸을 맡길 수 있도록 마디(bar)와 인터넷(net)을 통해 무한히 재생산되고 반복된다. 유튜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타입 비트들(Type Beats)은 특수함이라는 성질이 힙합 문화 내에서 어떻게 애플의 특수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현대 힙합의 가장 탁월한 점은 이 모든 과정들이 비교적 저렴한 방식으로 언제 어디서든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헤드폰과 노트북만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 몇 시간 혹은 몇 분 안에 그럴싸한 곡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곡에 바이올린의 소리를 넣기 위해 굳이 바이올린을 살 필요가 없으며, 당연히 바이올린 연주자는 더더욱 필요가 없다. 가상 악기 프로그램에 장착된 MIDI에 몇 개의 노트를 찍어낸다면 청력을 잃은 베토벤처럼 머릿속에서 멜로디를 짜내느라 고뇌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까딱 거리며 클릭 몇 번으로 오류를 손쉽게 즉석에서 바로 수정할 수 있다. 내가 만들어낸 프로젝트 파일은 모두에게 공유될 수 있으며 특정 규격에 맞춰 내보낸다면 모든 프로그램으로 쉽게 호환될 수 있다. 쉽고 빠르게 교환될 수 있는 높은 효율의 호환성은 힙합의 맥락에서나 무역의 맥락에서나 언제나 시공간적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좁혀낸다. 즉 호환성의 효율은 어떤 것이 다른 것으로 치환되는 속도와 범위의 측면에서 등급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클릭은 저비용-고효율의 경제적 탄지(彈指)와 다름없다. 다소 이상할 수 있지만 클래식 음악과 노동요를 비교해보자. 노동자는 노동요의 중독적인 멜로디와 반복되는 리듬을 아무런 생각 없이 곧장 몸으로 받아들여 노동 에너지로 치환해 낸다. 이처럼 노동요는 중독적인 훅(hook)을 통해 체내로 곧장 흡수되는 높은 호환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그 당시의 미국에서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노동요를 부를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초창기 노동요는 독창 선창자(singing leader)와 응답 합창(responding work gang) 사이의 교창 형식(anthiphonal relationship)을 통해, 끈끈한 공감의 호환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시킨다. 이러한 노동요의 형식이 기독교와 결합되며 재즈, R&B, 그리고 Soul 장르의 뿌리라고 평가받는 흑인 영가(Negro spiritual)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현대에 대부분의 흑인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Kanye West가 흑인 영가에 기원을 두고 있는 가스펠(Gospel) 사운드를 힙합과 접목시킨 것은 엄청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쇼생크는 죄수들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스피커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튼다. 클래식 음악은 노동의 루틴에 파묻혀있는 죄수들에게 삶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일종의 계몽적 감상을 선사한다. 즉 쇼생크는 '뭔가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픈 나의 삶'에 대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죄수들이 한 번쯤 응시하게끔 하고자 클래식 음악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음을 곱씹도록 만들며, 상당기간 소화되지 않을 여운을 남기는 소화불량의 고비용-저효율 음악이다. 물론 클래식 역시 앞서 말한 애플의 전략과 유사한 고급화 방식으로 현대에도 살아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여기서 언급한 몇 가지의 예시들은 저비용-고효율과 고비용-저효율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진정성이나 고귀함 따위가 특정 회사와 음악 장르를 현대 사회 속에서 유지시키는 주된 원동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에 대한 유의미한 고찰은 단순히 틀에 박힌 예술적 고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돈이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태의 본질을 고찰하게 만드는 입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의 문맥에서도 앞서 말한 비용과 효율의 관계를 새롭게 생각해봐야 한다.



4.

언제나 돈이 문제다. 그래서 예술도 경제의 논리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늦은 산업혁명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마도 늦었다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의 예술은 분명 경제의 논리와 꽤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빨리빨리!" 문화의 급한 성미는 시간을 착취하며 높은 성과를 낸다. 경부고속도로는 시간을 착취하여 증폭시킨 순환의 속도를 토대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다. 아침에는 커피와 그리고 밤에는 소주와 함께 많은 노동자들은 현대적 각성제를 맞아가며 가속화된 시간의 흐름을 쫓아간다. 우리는 모두 미친 스피드광들이다. 예술이라고 스피드를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스무 살의 예술가들에게 작품은 지문이 요구하는 지점을 향해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활강하면 되는 매드 맥스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지겹게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단어는 예술가들이 애용하는 KTX 고속철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표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표현의 영어단어인 express는 바깥을 의미하는 ex와 누르다를 의미하는 press의 합성어로 무인가를 눌러서 바깥으로 내보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 경우 표현이 지닌 메커니즘은 치약 통을 뒤틀어 치약을 짜내는 것과 같은 압축과 내보냄의 형식을 가진다. 예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경우에 언어는 이 압축의 역할을 도맡으면서 무엇인가를 내보낸다. 간단한 예시로 "슬프다"와 같은 추상적인 감정은 내 안에서 언어를 통해 압축되며, "슬퍼!"라는 발화 행위나 울음과 같은 형식으로 내보내 진다. (설령 밖으로 내보내지지 않더라도, '슬프다'라는 생각조차 이미 충분히 언어적인 것이다) 양파를 썰다 흘리는 생물학적인 눈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설령 그것이 말 그대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라 하더라도 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눈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표현의 행위는 언제나 언어에 빚을 진다. 달리 말하자면 슬픔이라는 비-언어적인 순수한 감정은 언어를 통해 착취되고 압축된다. (내가 이렇게 슬픔에 대해 써 내려가는 이 순간에도 사실 슬픔은 언어에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생각하는 비-언어적인 무엇도 이처럼 언어를 통해 압축되며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통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회화적 언어, 조형적 언어, 영화적 문법과 같이 예술에는 수많은 언어적 압축이 존재한다. 표현의 행위가 이러한 방식으로 요약될 때, 경제의 논리로 좋은 예술작품을 판단하는 근거는 언어와 물질의 매끄러운 호환성에 놓여 있을 것이다. 급행/신속을 의미하는 형용사 express가 '명확한'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expressus에서 기원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즉 경제의 논리에서 볼 때, 예술은 이 두 개의 express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 "얼마만큼 정밀하게 언어를 통해 압축되었는가?"와 "압축된 언어가 얼마만큼 정확하게 물화되었는가?"가 주된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경제적 현대 예술은 저비용-고효율, 즉 정밀한 압축을 통해 이해의 손실을 '최소화'(minimize)하고 고품질(high quality)의 만듦새를 통해 압축된 언어를 만족시키는, 언어와 물질 사이의 간극이 최소화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술에게 있어 저비용-고효율은 낮은 이해의 손실을 통한 높은 공감대 형성에 의의를 둔다.



5.

언제나 돈이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표현 과정 자체 안에 이미 '슬프다를 유발하는 무엇인가 슬픈 감정'과 같이 '압축되고 변환되어야 할 태초에 예술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예술에 대한 언어의 착취는 자본의 세계에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작품을 단순한 소비품으로 전락시킨다. "새로운 예술은 없다"와 같은 순진한 한탄은 잔혹하게 일어나는 언어 착취에 대한 꽤 무책임한 발언이라 할 것이다. 예술의 고갈은 예술에 대한 언어의 착취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예술의 불가능성은 모든 것이 벌목된 숲의 자리에 빽빽하게 들어선 도로를 보고 느끼는 숨 막히는 감상평에 불과하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라는 오래된 격언은 현대 부동산의 맥락에서는 터무니없는 말과 같다. 내가 새롭게 개척할 토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더 이상 새로운 예술은 없다"라는 말은 그 의미도 다소 불분명한, 타성적인 비관론에 젖어버린 돌림노래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새로운 예술의 불가능성은 새로운 작품의 불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정확하게는 '예술에 대한 언어의 착취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한정된 공간 안에 새로운 도로를 놓을 물리적 공간의 한계와 유통망의 한계에 대한 방법론의 부재를 의미한다. 사태가 이러할 때 신축 아파트와 새로 건설될 지하철 노선의 가치와 같이 당연히 자원의 가치 그리고 유통망의 가치는 상승한다. Anish Kapor가 벤타 블랙을 선점하는 것과 같이 작가들은 자신의 언어/자원/재료/테크닉/스타일을 신속하게 독점하는 동시에 사교라는 신속하고 효율 높은 고급 네트워크를 통해 성공적인 예술을 위한 안정적인 토대를 다진다. 한국의 힙합도 이와 대단히 비슷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쇼미 더 머니는 기믹으로 점철된 래퍼들이 펼치는 사랑의 작대기,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자원과 네트워크의 앙상블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한 전시의 오프닝 파티는 바닷물이 말라가고, 빙하가 녹아내리고, 산이 불타는 아포칼립스적 풍경과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젊은 예술가들은 착취와 카르텔로 대변되는 차세대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꿈꾼다. 대부분의 갱단의 보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듯 지속 가능한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회주의적으로 과도하게 압축된 언어와 고품질의 장식적 작품들은 빠른 유통망 속에서 격렬하게 소비되며 낭비된다. 비극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세계의 주요 분야에서처럼, 이제는 예술도 당연히 지속가능성을 위한 고비용-저효율이라는 비슷한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

언제나 돈이 문제다. 돈은 저비용-고효율을 좋아한다. 그래서 언어 역시 문제가 된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을 나가면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싶어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소통으로 인해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진다. 이 답답함의 감정은 정확히 말하면 자본적인 답답함이다. 말 한마디를 못하는 아기들끼리도 "까르르"하며 재미나게 노는 데, 언어 따위가 삶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큰 장벽이 될 리 없다. 오히려 성인들이 느끼는 이 자본적 답답함은 언어의 중요성을 반증해주기보다는, 언어의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자본적 요인을 역으로 반증해준다. 대한민국이 그토록 영어 학습에 진심인 것에도 이런 자본적 답답함이 한몫하는 것은 아닐까? 예술에서도 자본적 답답함은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예술의 언어가 얼마큼 편리한 수준으로 번역되었는가의 여부는 말할 나위 없이 작품 채점의 절대적 기준이다. 골머리를 썩혀가며 매혹적인 제목과 전시 명을 지어야 한다. 윤택한 텍스트와 작업 사이의 완전한 호환성은 이 자본적 답답함의 체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준다. 누군가는 분명 나에게 "형씨 그럼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이나 그려라 이 말이신가?"라고 심통을 부리겠지만, 그렇지 않다. 고비용-저효율 체제 속에서 기업윤리가 노동자의 권익과 환경 보전에 초점을 맞춘다면, 예술가의 윤리는 착취되는 대상, 착취되는 언어, 즉 예술의 언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래의 이상적인 경제 체제는 종의 지속가능성과 소비재의 지속가능성 사이의 황금 균형이 자리하는 지점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예술의 목표도 당연히 이와 유사하다. 예술가의 언어와 작품의 언어가 강압적인 착취 없이 균등한 밸런스를 갖게 되는 곳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이러한 예시는 언어의 예시로 조금 더 분명해질 수 있다. 언어를 자유자재로, 그러니까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구사한다는 것은 발화의 단계에서 뇌보다 혀가 선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무엇을 말해야지"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입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생각과 발화 행위 사이에 시간 간극이 거의 없는 단계를 대게는 모국어라고 표현하며, 대부분의 이들은 모국어와 함께 제2, 제3, 제4의 언어를 가진다. 영어와 한국어 두 언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언어의 전문가는 영어는 영어대로 한국어는 한국어대로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 댈 수 있다. 반대로 한국어에는 능통하지만 영어에는 미숙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게 머리에서 한글로 문장과 단어를 나열한 뒤,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후 비로소 입으로 말을 뱉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자의 경우에는 다른 두 언어가 나라는 하나의 통일체 안에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며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영어에 대한 한국어의 일방적인 착취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7.

언제나 돈이 문제다. 그렇기에 종국에 예술은 기존의 예술됨을 정의 내리는 문제적 방법론과 작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을 표현해라"는 예술가의 슬로건이 아니라 사업가의 슬로건이다. 편리한 자본의 언어와의 단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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