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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편 Aug 05. 2023

요즘 사회랑 예술

대한민국이 병 들어가고 있다는 점은 꽤 자명해 보입니다. 실제로 이상한 사고가 더욱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혹은 언론이 자체적으로 선별한 자극적인 소식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우려스러운 균열이 가시적인 층위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우리 모두 어렵지 않게 동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금의 갈등과 혐오는 상이한 종류의 개인이 가지는 생물학적/사회적/경제적 특질들, 타인과 맺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 개인과 집단이 소유한 자본, 그리고 상충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 등 여러 분야와 분류 안에서 골고루 빠짐없이 증대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회에 일어나는 이러한 균열이 봉합의 방향이 아닌 극단적인 갈라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 또한 꽤 자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군가는 마치 종말과 재앙의 상태로 현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꽤 평이한 시각으로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반된 태도의 기이한 공존은 이상하게도 우리 모두가 마치 기어코 이 균열의 끝을 보고자 하는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이게 만듭니다. 고통을 받는 개인과 집단은 서로의 상처를 무기로 삼아 보이지 않는 전쟁에 능동적으로 임하고 있으며, 불특정 개인과 집단은 그 어느때 보다 풍족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리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일상과는 동떨어진 듯한 이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은 차가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과 냉혹한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부조리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비교적 적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해 보이는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어렴풋하게 감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때때로 현대사회에서 이 여유는 냉소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되려는 예술가들 스스로에 의해 오염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냉정하지만, 순진한 시선이 지금 우리 사회에 부재해 있다는 생각에 이 이상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슐러 케이 르 귄이라는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글은 "우리가 시멘트로 덮어버린 유토피아의 균열 사이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야생 귀리와 양귀비"를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일 것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 실타래를 푸는 일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운동화의 매듭을 풀 듯, 한 줄기의 끈을 당긴다고 해서 복잡하게 얽힌 매듭이 풀어지지는 않습니다. 한 사회가 당면한 문제 또한 한 분야의 전문가가 내놓는 단편적인 의견으로도 혹은 한 성인군자가 제공하는 통찰력 있는 키워드로도 마법같이 풀릴 수 있는 단순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첨예하게 세분된 현대사회 안에서 한 개인이 가지는 전문지식은 다른 분야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무지한 수준에 머물 것입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가속의 시대에 각각의 세대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기본적으로 소통이라는 것이 이 시대에 유달리 어려울 수 있는 무엇임은 분명합니다. 여러 가지의 편차를 다층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현 사회의 특성은 쓸데없이 겸손하지만 유익한 목소리는 숨어들게 만들며, 쓸데없이 소리가 큰 궤변이 자연스레 그 자리를 채우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정보와 환경의 편차에도 불구하고(혹은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은 무서울 정도로 공통된 경험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소위 '커뮤니티'라고 불리는 인터넷 공간은 개인들이 가지는 혹은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삶의 스펙트럼을 극단적으로 압축하여 욕망할 수 있는 하나의 원형만을 제시합니다. 한 공간에서 추앙받을 수 있는 어떤 원형은 클릭 하나로 넘어갈 수 있는 다른 공간에서는 무엇보다도 혐오스러운 원형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가 마주하는 이 압축된 하나의 삶의 원형을 통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마법과 같이 해결하려 합니다. 각각의 커뮤니티(이는 웹사이트, 카페, 유튜브, 팟캐스트, SNS 등 개인이 속한 인터넷 공간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오프라인의 모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는 서로 각기 다른 하나의 원형을 유일한 답으로 제시합니다. 그곳에서 개인들은 무한한 동일화만을 경험하며, 사실상 이는 거울로 둘러싸인 방 안에서 살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거울에 비치는 타인들을 배척하며, 그들의 침입을 경계하고 혐오합니다. 타인의 불편함은 배려하고 사랑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닌, 배척해야 할 무례함과 무지의 역겨움으로 탈바꿈합니다. 누군가는 인터넷과 현실을 구분하라고 충고하겠지만, 우리는 사회의 저변에 놓인 개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으며, 현실에서는 경직되어 버린 대화의 장이 어디서 은밀하게 열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김어준 씨가 유튜브로 이적하여 첫 방송을 송출했을 때, 뉴스 공장은 3,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이는 당일 전 세계 유튜브 수익 1위를 달성하였습니다. 공중파 방송의 뉴스는 커뮤니티의 달린 댓글과 게시물을 심심치 않게 인용하며, 많은 인플루언서들은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을 개설한 지 오래입니다. 끔찍한 사태에 대한 모든 첫인상은 디지털 스크린에 의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디지털이 현실에 대해 가지는 어떤 우위도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허상과 같은 원형을 열망하지만, 그 원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왜 기피하는 것일까요?



 물론 제가 이 글에서 고찰해 보고자 하는 바가 '디지털 시대에 나타나는 우울한 부작용'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디지털이 가지는 특정한 성질이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시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본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어려운 문제를 어려운 문제로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인터넷 게시글에 좋아요/싫어요 버튼을 누르듯 사태에 대한 단발적인 그리고 단편적인 접근으로만 문제를 고찰합니다. 이는 다시금 겸손한 목소리와 시끄러운 궤변의 차이를 부각합니다. 깨끗한 시냇물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줄기를 따라 다양한 소재의 물들이 바다로 천천히 흘러 들어가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쏟아지는 인공적인 폭포수만이 당돌하게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많은 이들은 관련인들에 대한 책임 소재를 적극적으로 물었습니다. 누군가를 혹은 그 누군가가 내린 결정을 향하여 좋아요/싫어요 버튼을 마구잡이로 퍼부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행위가 정말로 사회가 가진 한 매듭을 풀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남성이 여성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을 때, 많은 이들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분노했지만, 정말로 논의되어야 할 부분에 대한 실천적인 대화의 장을 형성하려 노력했을까요? 사태에 대한 해결법을 협력하여 의논한다는 것은 흥미롭고 에너지가 넘치는 축제의 과정은 아닐 것입니다. 커피 한잔에 다과를 곁들이며 맞장구를 치는 즐겁고 유쾌한 동일화의 과정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자신의 원형이 기꺼이 파괴되길 받아들일 수 있는 장소여야 하며, 자신이 가진 아픔을 의도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하며, 자신의 취향을 아쉽지만 감추어야 하는 장소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도리어 타인의 원형, 아픔, 그리고 취향은 역으로 존중해야 하는 대단히 이상한 장소일 것입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그 어려움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를 거부하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원형, 상처, 그리고 취향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어찌 보면 그렇기에 정치인들이 존재하는 것일 듯합니다. 참으로 아쉽고 분개할 만한 점은 다양한 개인들의 원형으로서 그들을 대변해야 할 정치인들마저도 권력과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카르텔 혹은 하나의 납작해진 이데올로기, 즉 허상의 원형을 위한 원형으로만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 모두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의 실루엣을 어렴풋하게 보고 있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실체를 보기 위한 장막을 걷어 젖히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거티브 전략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일말의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사회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의 모습을 취해선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하실 듯합니다. 그런데도 현시대의 많은 이들의 감정과 행위를 촉발하는 주된 동기는 제로섬 게임의 원리에서 기인합니다. 사회의 전략은 분명 '자신과 상충하는 듯 보이는 집단'에 대한 공격이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끔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가장 단순한 생존 전략에 가까울 것이며, 시대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보증된 생존 전략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전략에는 분명히 하나의 맹점이 존재합니다. 그 맹점이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과연 그 누가 특정 사안에 대한 단 하나의 공공의 적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더 나아가서는 "단 하나의 공공의 적이 실제로 존재하느냐?"라는 질문도 따라붙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 불분명하지만 보증된 전략을 아무런 계산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용합니다. 선빵은 필승입니다. 낙인의 과정은 어쩔 수 없이 무자비한 일반화를 동반하며, 의도치 않은 희생자와 감당할 수 없는 연쇄작용을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모두가 제로섬 게임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의도치 않은 연쇄 피해자들을 감당하진 않으려 합니다. 우리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제로섬 게임의 원리는 인위적인 조작과 힘의 논리에는 대단히 취약합니다. 단순한 전략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문명화된 현대사회라는 간판에는 어울리지 않는 특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제로섬 게임의 약점은 사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우스꽝스럽고 추잡한 대부분의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추적할 수 없는 조작과 감당할 수 없는 힘은 단순한 세계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성공의 공식입니다. 부패한 권력은 언제나 제로섬 게임에서 쉽게 승리할 것이며, 그들이 제공하는 아주 적은 양의 파이를 두고 하위 집단들은 다시금 그들만의 제로섬 게임을 이어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균열은 비극적일 정도로 슬픈 싸움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싸움보다도 철저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이들은 언제나 팩트와 출처를 묻습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팩트와 출처를 요구하고, 더 나아가 이를 제공하는 자들조차도 팩트가 표방하는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사실 진실은 상대적일 수도 있기에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점은 가장 분명하다고 주장되는 무엇이 사실 가장 분명하지 않은 무엇이라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상황이 이러할 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진위성의 여부가 불분명한 팩트로 점철된 공허한 토론뿐 입니다. 공허한 팩트와 공허한 목소리, 그리고 공허한 토론입니다. 이 과정에서 논리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히 허울 좋은 팩트를 내세운 힘과 자본의 편차일 뿐입니다. 학계에서는 아닐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사회 일반에서는 말 그대로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기정사실로 되어 가는 수준입니다. 과학만능주의의 과잉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이성적이지도 과학적이지 못한 물질만능주의를 기꺼이 채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특정한 목적과 함께 의도적으로 해석된 '입맛에 맞는' 팩트는 다시금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만들지 못한 채, 다른 진형을 억압하고 공격하는 간편한 도구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타인과 타 집단에 대한 평가절하는 좋아요/싫어요 백분율의 균형을 맞추는 권리 수호의 행위가 아닙니다. 늘어나는 싫어요의 수는 그저 더 많은 혐오만을 쌓아 올릴 뿐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권리도 신장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신장하는 권리는 타인과 타 집단의 원형을 무차별하게 살해한 살인자의 권리일 뿐입니다. 온전하게 남은 하나의 원형은 온전치 않게 남은 여러 원형의 공생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이상적인 주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사회를 지속하는 근본적인 힘이 제로섬 게임의 단기적 쾌락과 성취로 점철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넌제로섬 게임(Non-Zero-Sum Game)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넌제로섬 게임에 현실성이 부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음에도, 넌제로섬 게임의 가치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총합은 100이 아닙니다. 100은 완전한 숫자이기 전에 충분히 넘을 수 있는 허상의 숫자입니다. 벨기에의 정치학자 샨탈 무페는 합의에 기반을 두는 실제적인 정치의 행위인 'politics'와 불합치에 기반을 두는 지시될 수 없는 가능성의 상태인 'the political'의 차이를 강조합니다. 제아무리 현실이 사회적인 구조와 규율들을 재생산하는 정책에 의하여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사회와 개인을 가능성의 상태에서 제거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치의 원리, 현실의 원리, 권력의 원리, 혹은 자본의 원리가 어떻든, 우리 스스로가 삶의 터전 자체를 땅따먹기 판으로 만들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기회주의적이라 칭할 수 있는 일련의 사고방식은 순수예술의 영역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납니다. 이는 어찌 보면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망상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울 수 있는 예술의 영역 또한 사회 일반이 가지는 경직된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공유합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유효해 보이는 담론과 미학에 자기 자신을 쉽게 동일화 혹은 동기화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 보이는 듯한 이 시대와 이 세대들에게 예술은 '힙하고 자유로운 허상의 원형'이라는 가치에 자기 자신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그리고 비판 없이 투영시킬 수 있는가를 가리는 자아 붕괴로 전개되는 치킨 게임입니다. 한국의 예술계에는 자체의 볼륨을 계속해서 넓혀가기 위한 움직임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대 기관은 '대중'들이 만족할 만한 수준을 자체적으로 정하여 '그 대중'들을 만족시킬 만한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자아도취적인 전시를 제작합니다. 큐레이터들은 무엇인가를 연결하고 발굴하며 재해석해 내는 직업군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넓은 인맥과 화려한 언변으로 그럴싸한 예술적 politics를 계속해서 재생산해 내는, 그들이 표방하는 취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남근적이고 정형행동적인 전시만을 반복합니다. 전시와 작품에 대한 많은 글은 글을 쓰는 작가의 어떠한 솔직한 생각과 담론도 담고 있지 않은 채, 전략적으로 끼워맞춰진 과거의 문구들과 기성 체제에 편입하기 위해 억지로 포장된 느낌 있는 글귀들과 공허한 단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은 최종 목적지가 교수직이라도 되는 듯, 자신과 작품을 하나의 날카로운 문장 안에 억지로 구겨 넣어 스스로를 홍보하기에 바쁩니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정의된 자신의 작품에 아무런 비판 없이 (혹은 머리를 싸맨 채 고뇌하는 거장의 이미지와 같이) 몰두하며 스스로를 세뇌합니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작품에는 아무런 발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만들어 낸 그들의 작품을 만듭니다. 누군가는 한국의 예술계가 어떤 방식으로든 발전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입니다. 타데우스 로팍, 에스더 쉬퍼, 쾨닉, 페이스, 혹은 프리즈 아트페어와 같은 거대 갤러리와 기관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정확히 어떻게 예술계를 발전시키고 있습니까? 샤넬, 구찌, 발렌시아가, 버버리, 그리고 프라다와 같은 거대 의류 브랜드가 한국에서 런웨이를 여는 것이 한국의 패션계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예술계가 가지는 수동적이며 기생적인 사고방식은 용감하고 솔직한 작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는 멋진 디자인 감각으로 만들어 낸 전시 책자를 만듭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는 같은 시기에 인정욕구로 가득 찬 열정 있는 예술가들의 전시를 준비 시켜놓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젊은 예술가들은 조심스럽게 오픈 스튜디오를 준비합니다. 그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는 작품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붐비는 코엑스 안에서 노티드 도넛을 먹습니다. 정말로 주도적이지 않은 일련의 기형적인 예술 프로그램을 집착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예술계 전반에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해외로 진출하여 국위선양을 할 수 있는 포스트 박지성, 손흥민, 박찬욱, 봉준호, 싸이, 그리고 BTS를 간헐적으로 제작하는 것이 사회의 소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에서 예술을 공부하지 않았기에 젊은 예술가들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진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육의 과정에 그리고 그들이 예술가라는 직업을 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과정에 유의미한 대화의 장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속칭 '아티스트 토크'라고 불리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은 딱딱하게 읊조려 지는 형식적인 강의의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어느 정도' 솔직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강단에서는 어느 실험적인 강의도 피드백도 크리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의 권력으로 조용히 상대를 짓누르는 언어의 예술만이 위에서 아래로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만일 이 일련의 형식적인 과정에 회의감 혹은 피로감을 느끼는 조용한 작가들은 어쩔 수 없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모든 작가는 자신을 시냇물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로 흘러 들어가야 할 시냇물이라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분명 많은 작가는 여전히 어디선가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을 조용하게 혹은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쉬운 것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작가는 역설적으로 세상 밖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토론이 일어날 때 혹은 성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분쟁이 일어날 때, 많은 학자와 작가들은 그들의 고고함을 지키기 바쁩니다. 정작 대중이 매체에서 목도하는 것은 서로의 잘못을 비난하는 두 명의 목소리 큰 패널들일 뿐입니다. 작가는 와인 한잔을 마시며 느낌 있는 바에서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다큐멘터리 작가와 같이 개입하지 않는 전지적인 사람입니다. 무단으로 모든 것을 사용하지만 아무런 개런티도 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작가와 학자의 과업이 '무지몽매한 대중'을 계몽시키는 것도 사회 운동을 개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작품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특정한 영역 안에서 꽤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데 반해 관련된 모든 사태에는 비정하리만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태도를 기만적이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이런 의구심이 머리를 스쳐 가는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많은 작가가 어려운 문제를 다시금 어렵지 않게 그리고 무겁지 않게 그저 그들의 작업을 위한 흥미로운 재료 혹은 전략으로 사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당한 사회적 인식에 반항하는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 멋있는 차림으로 잡지의 표지에 실린 채 멋있는 인터뷰를 척척 내놓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텍스트 안에는 앞서 제가 이야기한 제로섬 게임의 공격적인 논리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배제의 논리는 언제나 은밀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부당한 사회적 상황에 반항하는 작품을 내놓는 작가들은 기를 쓰고 서울에 머물며 멋들어진 공간에서 그럴싸한 자막으로 뒤덮인 무기력한 다큐멘터리를 내놓으며 자화자찬합니다. 물론 현실이라는 장벽과 서울이라는 거대한 중심을 의도적으로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한 비판이 타인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부당한 사회적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자유로운(듯한) 예술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은 행복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며, 자신의 감상 안에서 순진한 듯한 제스처만을 신경질적으로 고집합니다. 해맑은 웃음을 언제나 순수함과 병치합니다. 웃는 얼굴들로 가득 찬 모델 하우스로 모두를 초대합니다. 모델 하우스는 모든 더러운 일이 일어나는 사회의 다른 공간과 정확히 무엇이 다릅니까? 어떤 의미로는 솔직하지 못한 다양한 전략들을 통해 그들은 팽창하지 못한 채 경직된 예술계 안에서 조그만 파이를 얻어갑니다, 그리고 이는 젊은 작가들에게 그리고 대중들에게 예술계의 작동방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들어 줍니다. 작품을 의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한 논리 안에 고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예술계에 대한 조금은 감정적인 비판에서 저는 사기꾼의 형상을 봅니다. 많은 이들이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을 대한민국의 어떤 질병은 많은 사기꾼에 의하여 비참하게 곪아가고 있습니다. 넌제로섬 게임은 분명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단기적인 희생은 장기적인 치유의 과정에 필수적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회의 또 다른 문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기적인 쾌락에 문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충동적으로 반응하며, 단기적인 희생에 역시 문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짧은 쾌락의 무한한 연쇄작용은 모두를 장기 희생자로 만들 것입니다. 주식은 더 이상 기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공생의 행위가 아닌, 도취의 순간에 탑승하는 기생의 게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많은 직장인이 지하철에서 바라보던 비트코인 차트는 단순한 열풍 이상을 시사하는 서늘한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바라봐야 할 요소는 사기꾼들의 무책임한 탁란(托卵) 행위일 것입니다. 탁란이란 새가 다른 새의 둥지에 자기의 알을 낳아 키우게 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자연에서야 이는 생존 전략으로 작동할 수 있겠으나, 인간 사회에서 이와 같은 행위는 반인륜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기꾼들에게 누군가의 희생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잉여 공간이자 기꺼이 오용해야 할 효율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치인, 유튜버, 혹은 예술가와 같이 많은 이들은 비극적인 사건, 사회적 이슈, 해외에서 인증된 가치에 몰래 알을 낳고, 그 안에서 자신의 원형을 다시금 잉태시키려 합니다. 결국 논의 되어야 할 구멍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존재해야 할 공허의 공간은 사기꾼들의 알로 채워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희망의 구멍은 알 박기 당합니다.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미술 이론가인 보리스 그로이스는 <불신의 담론: 음모론과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그의 글에서, 과거에 이데올로기 비판(막시즘)이 담당하던 메타-추론적인 공간이 이제는 음모론들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그의 분석은 대부분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메타-추론적인 공간, 즉 사회를 멀리서 고찰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반체제적인 공허의 공간에 조차 뻐꾸기가 알을 낳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음모론들로 돈을 버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음모론의 음모론으로도 돈을 버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현재 너무 많은 뻐꾸기가 존재합니다. 결국 현재의 생태계는 아무도 자신의 알을 낳아 기를 수 없는 비극적인 환경으로 변모하였습니다. 고유한 가치의 번식과 신뢰할 수 있는 생태계에 대한 믿음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원형의 알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끔찍한 일입니다. 어떠한 고유함도 설렘도 알을 깨고 나오지 않을 것을 안다는 것은 규율과 법칙을 무너뜨리기 충분하며, 쾌락적이고 도피적인 삶을 택하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결국 이 글의 끝은 이상적인 결론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의 한끝에는 피해의식으로 가득 찬 소외당한 자들과 다른 한 끝에는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소외당한 자들이 존재합니다. 왜 그들은 루저 혹은 대가리가 깨진 사람으로 묘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노인일 수도, 어린이일 수도, 부자일 수도, 가난한 자일수도, 내국인일 수도, 외국인일 수도, 성 소수자일 수도, 혹은 자기 자신을 아직도 모르는 누군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지라도, 대립 항을 찾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저는 로버트 고버라는 예술가를 좋아합니다. 그는 이제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백인 미국인 게이 남성입니다. 만약 로버트 고버가 대립 항을 찾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꽤 많은 대립 항을 찾아 스스로를 단단하게 무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상과 환경을 생각해 보면, 그가 피해의식 혹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상태로 절벽 끝에 무장한 채 서 있지 않은 게 신기한 수준입니다. 그의 작업은 충분히 정치적일 수 있음에도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그 또한 케케묵은 여러 논리를 격파해 가며 스스로를 외부에 보란 듯이 쉽게 입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길을 여러 사람과 솔직하게 걸어온 듯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단 하나의 논리로 그의 작업에 접근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의 작업도 한 가지의 논리로 저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저는 그의 작품에서 고유한 한 인간을 바라봅니다. 변태적이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한 인간의 형상을 바라봅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사태를 섣부르게 판단하기보다는 고유한 개인의 이야기에 감화되며, 예술가로서 저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저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아도, 그의 작품에서 다시금 나의 모습을 찾을 열망을 얻습니다.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다른 작품을 배격하기보다는, 그의 작품을 품은 채 아마 미래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함께 관람할 것입니다. 분노와 혐오는 분명 종종 효과적이고 빠른 해소법으로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와 혐오가 유일한 길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험한 일입니다. 가장 쉬운 길은 가장 짧은 길이며, 가장 위험한 길입니다. 운이 좋아 직접 방문했던 로버트 고버의 아티스트 토크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말하는 행위는 과대평가 되어 있으며, 듣는 행위는 과소평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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