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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쓴이 Nov 06. 2024

나무가 추운가 봐

각인

환갑이 넘은 아버지는 불혹을 목전에 둔 나를 보며 아직도 5살의 꼬마를 떠올린다.


1992년 2월, 막내 동생의 출산을 앞둔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산골에 살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던 나와 여동생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하시는 아버지가 돌보기란 어려웠다. 게다가 이따금씩 병원에 들르며 입원 중인 어머니를 챙기셔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 이산가족이 되어야만 했다.


감사하게도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는 친척만큼 가까웠던 이웃들이 있었다. 5살, 3살 난 나와 동생은 각각 다른 집에 맡겨졌다.


초등학교 주무관으로 일하시던 이웃집 아저씨 댁에 맡겨진 나는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 시절의 정은 기본적으로 뭉근하고 깊었지만 꼬맹이가 부모와 떨어져 홀로 있으며 외로울까 봐 특히나 더 신경을 써주셨던 것 같다.


아주머니는 매 끼니 맛난 음식을 해주셨고, 그 집의 형과 누나는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었다. 본인들 또래 친구들과 놀 때 나를 ‘깍두기’로 삼아 끼워주던 다정한 어린이들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아버지께서 짬을 내어 나를 보러 와주셨다.


너무 어린 시절이라 아버지가 내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잘 지내고 있으라는 당부와 따뜻한 눈빛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5세의 나는 아버지에게 ’걱정 마세요.‘라고 말한 뒤돌아서서 뒷짐을 지고 논길을 걸어서 아저씨댁으로 향했다고 한다.


갓 서른이 된 아버지의 눈에 그 모습이 진하게 맺혔는지 대견하고, 짠하고, 미안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어 한참 동안 돌아보지 않는 내 뒷모습을 쳐다보셨다고 한다.


오늘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딸과 놀이터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딸은 아빠와 함께 태권도에서 하원하는 오빠를 기다리며 미끄럼틀과 시소 타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오늘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놀이터에 평소와 달리 친구들이 한 명도 없었다.


세찬 바람에 사방으로 날리는 낙엽만이 남아 가을의 쓸쓸한 정취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날씨와는 상관없이 그저 신이 나서 뛰어다니던 자그마한 체구의 딸이 고개를 들어 키가 아주 큰 나무를 바라보다가 허공에 손을 뻗어서 연신 흔들어 댔다.


그러더니 나를 휙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빠!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서 나무가 추운가 봐! 나무가 오둘오둘 떨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으며 대답했다.


’정말이네? 바람이 강해서 나무가 많이 추운가 보다. 어쩌지?‘


내가 한 걸음 걸을 동안 두세 걸음을 걷는 짧은 보폭의 딸은  분주하게 뛰어가 두 손을 뻗어 나무에 착 붙이고서는


‘안아줘떠! 내가 안아줘떠! 춥지 말라구’


라고 말하며 ‘나 잘했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딸을 번쩍 안아 들고는 기특하다고, 나무가 고마워하겠다 말하며 꽉 끌어안았다.


‘네가 어렸을 때 얼마나 귀여웠는지 알아? 하루는 너 어린이집 끝나고 놀이터를 갔는데 말이야…’


조막만 한 귀여운 딸이 주름지고 흰머리 성성한 중년의 여성이 된다 해도, 딸이 지겹다고 그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라도 나는 아마 몇 번이고 이 날의 순수하고 무해했던 아이의 모습을 곱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환갑이 지나고 칠순이 지나도 이 모습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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