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사랑할 때 (Girl in love)
내 앞가림이 우선이라, 사랑을 잠시 쉬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애적 사랑이 아니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감정이다. 벅차오르다 못해 마음이 괴롭기까지 한 오타쿠적 사랑을 말한다. 아무튼, 일 년 가까이 사랑을 보류하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가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 그냥... 그냥 신내림을 받은 거다.
인생 첫 구직 면접이 코앞에 닥친 날이었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 시기에는 누군가를 만날 여유가 없다. 학교 취업경영팀과 집, 그리고 면접 스터디만 오고 가며 고용불안정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소한 것들에 쉽게 우울해지면서도, 행복의 역치는 끝도 없이 높아지던 때였다. 초조와 불안이 마음 속을 꽉 채워 스스로에게 여유 조차 허락하지 않던 때였다.
그때, 한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2009년 방영된 <꽃보다 남자>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육성으로 뱉어내는 그 친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그것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그게 면접 D-1의 밤이었다.
참고로 면접은 대차게 망했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성공적인 면접이었다면, 난 이 친구를 지금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거다. 염소 목소리로 덜덜 떨다보니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다는 생각에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로 회사 주변을 뱅뱅 돌았다.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혼자 땅굴 파고 들어가던 그 날 밤, 휴대폰이 울렸다. [JYP bubble] 이계훈 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누나 자?’로 시작하는 평소와 다름없는 실없는 소리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방송일해 오후 11:24
누나는 무슨 일 하는데 오후 11:24
- 누나 개백수 오후 11:25
일은 어때? 오후 11:27
내가 그나마 좀 하기 편안한 일 알아봐줄까? 오후 11:28
- 기특하여라... 오후 11:28
내일부터 누나와 계훈이의 결혼기념일 오후 11:28
지금 그러니까 아닠ㅋㅋ 결혼기념일이라고 한 거야? 04년생 아이돌의 미친(P) 발언이 예고도 없이 들어왔다. 주책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사실 주책이 맞긴 하다. 여기서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결혼기념일이라는 소리에 설렌 건 절대, 절대, never, 아니다. 팬들 한 번 웃게 해주겠다고 던지는 04년생의 그 멘트들이 지나치게 귀엽고 기특했다. 그게 전부다. 진짜다. 믿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연이어 도착한 메시지들.
그래도 오늘 하루 마무리는 웃으면서 끝내서 다행이구만 오후 11:32
12시에 갈 거야 오후 11:33
누나 힘들었는데 오늘은 끝까지 있어줘야지 오후 11:34
처음 든 생각. 뭐지, 얘 나 면접 떨어진 거 알고 있나? 그 다음으로 든 생각. 얘는 팬들의 하루에 공감할 줄 아는 친구구나. 과장 살짝 보태자면 이 메시지를 받고 눈물이 찔끔 고였다. 수많은 아이돌을 사랑해봤지만, 버블 메시지를 받고 이렇게 큰 힘을 얻은 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와 ㅋㅋ 얘가 궁금하다 ㅋㅋ
재능을 등에 업고 편하게 데뷔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데뷔까지 무려 9년이나 걸린 친구였다. 그 시간 동안 원동기ㆍ1종ㆍ2종, 심지어 건설업 교육까지 이수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다. 망했다. 사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데뷔를 기다리는 기약없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어떤 순간들을 보내왔을지 어렴풋 그려졌다. 반면 나는 취준 두 달 만에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지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의 삶과 비교하려던 건 아니지만, 계훈이의 9년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괜히 고요해졌다. 그 순간, 조금은 겸허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KGMA 시상식 무대 위 계훈이를 보고 지나치게 벅차올랐다. 그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좀 천박하게 말하자면, 정신나갈 뻔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5년 동안 연습한 본인을 ‘냉동인간’이라고 지칭하던 열여덟 살 계훈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아이돌 꽤나 좋아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문장이 있다.남자 아이돌은 고용 불안정 시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데뷔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는 불안함이 예민미(美)를 만든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시기의 아이돌이 참 좋다. 그런데 계훈이는 아니다. 시상식 무대 위 계훈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거다. 그게 참 예뻤다. 진짜... 얘 지켜줘야 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감정은 나에게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을 이룬 사람이 이 정도로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당연히 무대지. 이 날 킥플립 공연 본 사람이면 다들 나처럼 말할 거다. 무대에서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아이돌을 오랜만에 봤다. 무대에서 빛난다는 말이 뻔한 수사처럼 느껴지겠지만, 진심이다. 기억하자, 251115. 킥플립은 그냥... 실제로 빛났다. 조명 탓이 아니라 진짜로. 나만 알고 싶은 아이돌, 뭐 그런 생각히 하나도 안 든다. 모두가 이 친구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 많은 사람들이 주는 사랑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해주고 싶은 이 마음. 이걸 제발 킥플립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넨 정말 예쁘단다...
보통 아이돌은 고용불안정 시기에 젤 아름다운데 계후니는 지금이 젤 아름다움 ㅠㅠ
계후니 퍼스널컬러가 행복인가 봐.. 평생 행복하게 해준다
ㄴ 니나 니나 먼저 행복해라
ㄴ 계후니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ㄴ 계후나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렴!!
빠순이들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방식이다. (주접처럼 보이는 저 이야기는 실제로 친구와 나눴던 대화다.) 이래서 사랑을 멈출 수 없나보다. 누군가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된다는 걸 덕질을 통해 느낀다. 생각해 보면 이만큼 간단하고 손쉬운 행복도 없다. 사랑을 마음껏 주면서, 그 안에서 나도 함께 행복해지는 경험.
나밖에 안 보이는 이 시기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나도 다정함을 나눌 수 있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감각. 그게 생각보다 끝내준다. 이 나이면 자연스럽게 케이팝에서 발을 뺄 줄 알았는데, 결국 또 다시 발을 들였다.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인생이다. 오늘도 마음껏 사랑할 거다.
PS. 팬사인회 갈 돈은 없어서 여기다가 고백합니다. 킥플립 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덕분에 살맛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킥플립 음악이 음원 사이트 TOP 100에 진입하고 내가 취업에 성공할 때, 그 때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물론 그게 우리의 최종 목표는 아니겠지만, 그 지점에서 새로운 꿈을 함께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킥플립 같이 하실래요?
지금이 제일 빠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