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세계의광장 스토리-
신은 자연을 창조하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도시가 생기고 문명이 발전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광장이 있었다. 광장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광장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 또는 그 이전부터 그리스 아테네 시민들 삶의 중심지였던 고대 아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아고라는 그리스 문명이 잉태된 요람이다.
아고라(agora)는 ‘시장에 나오다’ ‘물건을 사다’는 뜻의 ‘아고라조(Agorazo)’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주요 도시들에 만들어진 아고라는 상거래를 통해 주민들의 일상이 펼쳐진 무대였다. 나아가 사람들이 공적·사적 일에 관해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만나는 도시의 공공 장소로 발전했다. 고대 도시에서도 진정 도시답다고 불릴 만한 곳은 아고라의 열린 공간이었다.
아테네의 중심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 올라 북서쪽을 내려다보면 고대 아고라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들의 도시 한가운데 인간이 만든 최초의 광장이다. 웅장한 파르테논 신전을 뒤로 하고 아크로폴리스를 내려오면 고대 아고라로 향하는 길에 작은 언덕이 나온다.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종교심이 뛰어난 그리스 시민들에게 예수 부활의 신앙을 설파한 아레오파고스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름을 딴 곳으로, 당시 지식인과 유력인사들이 자주 모여 토론하던 곳이다. 지금도 아레오파고스 바위에는 사도 바울이 연설했던 곳이라는 안내 동판이 걸려 있다. 아레오파고스를 지나 찾아간 고대 아고라는 부서진 대리석과 무너진 건물 더미가 여기저기 나뒹구는 황량한 폐허의 현장이었다. 그 현장을 걸으며 널브러진 돌과 웃자란 풀 사이로 2500여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광장의 흔적을 더듬어봤다.
고대 아고라는 아테네 도시국가 시절 최초의 직접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민회(시민총회)가 열린 곳이다. 민회는 나중에 프닉스(지금의 프니카)로 이전되었지만 처음엔 아고라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고대 아고라의 아탈로스 주랑 옆에는 아테네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각자의 주장을 폈던 연단이 남아 있다. 아테네 시민이라면 지위와 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연단에서 발언할 수 있었다.
고대 아고라에는 시민법정도 있었다. 시민법정에서는 30세 이상 아테네 시민들 가운데 추첨으로 뽑힌 배심원들이 재판을 담당했다. 오늘날 국민참여재판인 셈이다. 재판이 열리는 날 법정에 나온 사람 중에서 즉석 추첨으로 매년 6000명의 배심원이 선출됐다고 한다. 아테네 사법제도를 다룬 연극에 등장하는 한 아테네 시민은 “법원에서 우리의 권력은 왕권 못지않아요”라고 말할 정도로 변호사가 없던 시절 일반 시민들의 영향력은 컸다. 당시 배심원 추첨에 쓰인 기계 ‘클레로테리아’가 지금도 고대 아고라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대 아고라는 경제 중심지였다. 크고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특히 아고라 중심에는 ‘미들 스토아’(middle stoa)라는 길이 147m의 가장 큰 건물이 있었는데 시장의 중추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고대 아고라 중심에는 미들 스토아의 큰 하얀색 주춧돌이 여러 개 남아 있어 당시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아고라는 종교 활동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스 신 중 가장 손재주가 좋았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모신 신전만 현재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아폴론 신전, 제우스 신전, 아레스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아고라 입구에는 아그리파 음악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음악당 입구에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물고기인 트리톤(포세이돈의 아들)을 새긴 조각상이 남아 있다. 대리석이 깔린 무대에 1000명의 관객이 한꺼번에 입장할 수 있는 큰 공연장이었다. 고대 아고라는 문화생활의 중심이었다. 연극을 통해 시민들은 교양을 갖출 수 있었고 교양있는 시민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다. 이처럼 고대 아고라는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법,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아테네 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대 아고라에 이어 아테네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Pnyx)를 찾았다. 프닉스는 그리스어로 ‘군중이 꽉 들어찬’이라는 뜻이다. 길을 묻고 물어 해 질 무렵 어렵게 찾은 프닉스는 아크로폴리스 아래 아레오파고스 언덕 건너편에 있는 평범한 언덕이다. 하지만 페리클레스 등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이끌었던 주요 정치인들이 열변을 토했던 곳이다.
현재 프닉스에는 3개 계단으로 된 연단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프닉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최대 6000명이었다고 한다. 민회는 아테네에서 시민권을 가진 20세 이상 성인 남자들이 모여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토론과 투표로 결정한 회의였다. 1년에 40여 차례 열렸는데 다수결 원칙이 그때 등장했다.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도 시민권이 있으면 민회에 참여해 자신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었다. 아테네 민주정치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투표로 정해 추방하는 ‘도편추방제’가 실시된 곳도 프닉스였다. 도편추방제는 독재자의 출현을 막기 위해 도입한 제도로, 민주정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투표한 다음 총 6000표가 넘으면 국외로 10년간 추방하던 제도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으로, 아테네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테미스토클레스도 도편추방제에 의해 고국을 떠나야 했다.
민회를 통해 다져진 직접 민주주의의 힘이 아테네 공동체의 단합을 이끌었고, 아크로폴리스로 상징되는 그리스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아크로폴리스에 주목하지만 그 토대는 민회였다. 그리고 그 민회가 처음 시작된 곳은 고대 아고라의 열린 광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