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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는 존재여야만 할까?

두서없이 글을 쓴다는 건 오랜만이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쓰는 글이며,

둘째는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으로 쓰이며,

셋째는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로 쓰이며,

넷째는 필사를 할 때 쓰인다.



'과연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질문한다면 내 기준에선 셋째가 가장 좋은 글이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엔 첫째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설득시키려는 목적으로 작성했으니까. 정보의 질은 음식의 맛과는 다르다. 음식에는 손맛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정보에는 그런 손맛보단 기대하게 만드는 예고편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예고편에 이어 명확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면 그 자체로 명품이다. 그래서 첫째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가성비적 사고'와 글을 안 읽기에, 필요하지 않은 글이라고 판단하면 읽지 않는다. 하지만 설득을 시켜서 필요하게 만든다면 필요하다고 착각해 버리고, 글을 흥미롭게 읽게 되니까.



간혹 여러 글을 쓰면서 '정체성 혼란'이 올 때가 많다. 이 삶은 '상대를 위한 나'인 건지, '나를 위한 삶'인 건지 헷갈리니까. 이런 고질적인 문제는 글뿐만이 아니다. 살아가면서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느낀다. '꾸밈'에 있어서도 '개성'이 존재하지만, 한 집단에서 '다름'을 가진 존재는 우선 삿대질받기 마련이다. 머지않아 삿대질의 힘은 약해지고, 인정을 하곤 하지만 그런 순차적인 과정이 존재한다면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업의 뿌리는 '소비자 만족'의 크기니까. 소비자가 만족을 할수록 에너지는 구축한 사업의 크기로 흡수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된다.



'오직 타인을 위한 삶이라면 굳이 왜 살아가야 하는 가?'


한창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에 대한 주제로 콘텐츠를 자주 읽었다. 솔직히 이건 별 부질없다고 느꼈다. 개인 가치관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 속 캠핑을 좋아하는 일로 삼았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선 2가지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존재한다. 1) 우월감을 가진 사람, 2) 자연 속 힐링이 필요한 사람 이 둘은 캠핑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 하지만 1)은 우월감의 자신의 욕구이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분위기 있는 소품,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고집하고, 애써 에너지를 써 사진을 찍어 SNS에 업로드까지 한다. 이것이 1)이 고집하는 캠핑으로부터의 힐링이다.


* 2)는 어떨까? 오직 자연 속 힐링만 필요하기에 그 외에 것들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기에 캠핑 도구들은 최소한의 기능으로, 음식도 가볍게 먹기만 하면 된다는 주의다. 2)는 오직 어떤 자연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 vs 잘하는 일'은 아주 멍청한 토론 주제라고 생각한다. 어느 일이냐에 따라, 어느 가치관이냐에 따라 수 없이 변질되는 문제기 때문이다. 이걸 다 외면하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니. 그걸 왜 굳이 선택해야 하는 가? 의문만 남기게 된다. 이분법적인 사고를 선택하는 순간 모든 걸 극단적이게 사고하며, 다른 부분을 통찰하지 못하게 되니까.



적어도 난 '잘하는 일'이 좋다.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스스로 못하는 데 좋아한다면 우울할 것 같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 잘함과 못함의 실력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관하다. 예로 그림을 그리는 창의적인 영역은 내 멋대로 할 수 있으니까. 정답이 없으니까.



그럼 다시 주제로 돌아와, 타인을 위한 삶이라면 이 삶은 참 낭만이 없다고 본다. 결국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행복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럼 행복을 주어야만 행복을 받을 수 있는 존재란 뜻이다. 



그럼 끊임없이 행복을 줄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일. 그러려면 열정과 재미의 교집합이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잘해야 된다. 흔히 말하는 천재적인 재능이 아니어도. 노력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충분하다. 우연히 그 '일이 세상에 필요한 일'이 된다면 행복의 크기는 갑작스럽게 커지고 만다. 그제야 지겹도록 들은 '성공'이라는 걸 했다고 끄덕이게 되는 게 아닐까?



이런 성공에도 저주와 축복을 가루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A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 고집했고, B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고집했다고 가정해 보자. A는 타인을 보고, B는 자신을 본다. 이걸 무한으로 반복해야 된다면 A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게 되고, B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저주와 축복이 나뉜다.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A가 언제든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로 목적지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A를 사랑한 사람들이 원하는 건 '받는 것'이었기에 A를 사랑할 명분이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새로운 '팬'을 구해야 할 것이다. 반면 B는 목적지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사람들이 사랑해 주고 필요하다고 말해주니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고 말한다. 



이럴 거면 차라리 B처럼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근데 함정이 있다. 애초 글을 쓸 때부터 B의 사상을 추구하고 글을 써왔다. B의 사고관처럼 사는 게 어쩌면 자신을 더 세상에 심판받을 수 있고, 재능이라는 걸 발견하는 유일한 과정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자신다움'이라는 말처럼. 이 삶에서 '자신다움'을 찾기 위한 유일한 과정이라고 본다.



그리고 난 적응하는 인간이라 그런지, A처럼 살다가 B로 가겠어라는 건 망상이라고 본다. A처럼 살기 시작하면 단단한 근육이 생기기에 선뜻 쉽게 B로 넘어간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가치관이 변화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요구된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 또 가능하겠지.' 충분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필요 이상의 '이유'와 '에너지'가 요구된다고 본다. 적어도 난 그런다.



결론으로 당장 필요한 일을 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자신이 재미와 열정을 느끼는 일을 찾는 게 이 장기적인 인생에서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게 우연히 세상에 필요한 일과 겹쳤을 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건 순리적인 이치이니까. 굳이 이런 모든 과정을 외면하고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려 애쓰는 건 마음의 문제다. 빠르게 성공하고 싶다는 급박함. 그게 가치관이라면 상관없다만 난 아니다. 내 목표는 나라는 존재가 무엇에 사랑을 느끼고, 공존하게 살아가는 힘을 지니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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