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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Mar 23. 2023

아이는 부모를 바란 적 없다

영화 <미성년 생존기> - 최진석 감독

부모는 가족을 선택했다. 자신의 배우자와 가족이 되기를 선택했고 아이를 낳아 기르길 택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가족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주어진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하기는 커녕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에조차 동의한 적 없다. 부모에게 가족의 불화는 자신의 선택에 따르는 책임임에 반해 아이에게 가족이 주는 상처는 불가항적으로 지워진 짐임을 이해하지 못 한다는 것이 이들 관계의 갈등의 근원이다. 해맑고 다정하기만 하던 아이가 영문도 모르게 냉담해지면 부모는 마냥 사춘기를 탓하지만, 가족이 부조리함을 인식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 과정에 반드시 찾아오는 필연이다. 




엄마와 새아빠와 사는 민주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며 아빠를 찾아 나선다. 아빠가 사는 집이라며 무작정 옆집 문 앞에서 서성이는 민주를 본 아주머니는 아이를 돕기로 한다. 그가 민주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민주가 꼭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도 민주 또래의 아들이 있고, 아들을 재혼 가정에 들였음에 미안해 한다. 줄곧 아주머니에게 뾰족하게 굴다가 그 친절과 관심, 그리고 아들 이야기에 마음을 연 민주는 아주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빠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다시금 혼란스러워 한다. 쉽게 아주머니의 집 앞을 떠나지 못 하는 민주는 새 가족에 마음을 열기 위한 분투 중이다. 




가족을 지탱하는 것에 대한 공은 주로 부모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양육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 부모의 헌신처럼, 아이 또한 근본적인 부조리함을 인식한 후에도 가족을 포기하지 않고자 노력한다. 아이는 언제나 부모로부터의 사랑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쉬이 마음을 닫아버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민주는 정말로 옆집에 아빠를 찾으러 온 것 같지는 않다. 민주는 경비 아저씨에게 혼이 날 때까지 아파트 현관 앞에서 서성인다. 정말 아빠가 사는 집이라면 초인종을 눌러보거나 전화할 법도 한데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오히려 아빠가 사는 집의 호수를 알면서 아빠나 아빠의 재혼 상대인 아주머니의 관심을 끌고자 일부러 옆집에서 소란을 벌였다는 설명이 더 그럴 듯하다. 민주는 아빠가 아니라 아주머니를 찾아왔음은, 아이로서 경험한 가족의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족에게 완전히 마음을 닫아버리지는 않았음을 뜻한다. 


민주의 이야기는 가족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의 여정과 닮아 있다. 아이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신뢰에 일체 의문을 품지 않다가도 때가 되면 가족에게서 받는 불합리한 상처와 슬픔에 분노한다. 아이는 언젠가 맹목적으로 부모에게서 사랑을 갈구하기를 멈추고 자기 주도적으로 가족 관계에 대한 탐색을 시작하게 되어 있다. 영화의 제목인 ‘미성년 생존기’란 이처럼 부조리 속에서 부모를 이해하고 가족 안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할 것이다. 민주가 부조리함의 혼란 속에서 새 가족에게 끝내 마음을 열었기를, 민주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 안에서 가족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이 기특히 여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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