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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서영 Sep 18. 2023

<헤어질 결심>과 로맨스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

로맨스 영화에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나는 ‘첫 눈에 반하는’ 영화가 싫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져버린 인물들 앞에서 나는 소외감을 느꼈다. 첫 눈에 반했다면 그 뒤로 이어지는 로맨스에는 아무 이유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주인공에게 반해버린 건 내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인데, 그들 관계에서 파생되는 아무런 개연성 없는 감정과 서사를 내가 어떻게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로맨스란 목숨을 구해줬다거나 외로운 주인공에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인물이라든가 하는 서사적 도움 없이는 원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인 감정인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로맨스 영화는 아주 특이하다. 로맨스 영화는 관객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로맨스적 사랑(Romantic love)이란 본질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다. 그건 분노나 슬픔과는 다른 감정이며, 나아가 모성애나 형제애 같은 종류의 사랑들과도 다르다. 행복이나 분노, 슬픔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감정으로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감정들을 느낀다. 또 모성애나 부성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는 자식이라는 개인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기 자식이라는 개념을 사랑한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낳은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또는 입양을 통해 가족이 되기로 결정한 아이라는 점을) 사랑한다. 모든 사람은 부모이거나 자식이므로,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자식으로서 모성애를 경험한 많은 사람이 적어도 보편적인 수준에서 모성애를 이해한다. 


그러나 로맨스적 사랑이란 서로의 배경과 성격, 처음 만나게 된 맥락, 함께 경험한 모든 만남들과 공백, 서로 나눈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내용과 뉘앙스가 어지럽게 포개져 있는 총체이다. 이 사랑의 원인은 특정한 개인의 성질이나 역사에서 발생하고 또다른 특수한 그것들을 가진 개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속하므로, 쉽게 외부로 전이될 수 없다. 따라서 영화 속 두 사람의 연애를 관전할 때 우리가 이해하는 건 그들이 서로 사랑에 빠졌다는 개념일 뿐, 그들이 느끼는 바로 그 감정이 아니다. 그건 단지 우리가 영화 속 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당사자인 개인들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말이나 글, 영상과 같은 수단으로는 쉽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내 친구의 연애는 적어도 두 번 경험된다. 본인에게서 한 번, 그리고 그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을 읊어줄 때 내게서 한 번 체험된다. 나는 그 관계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연애의 거의 모든 단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친구의 연애 상대만큼이나, 자만하자면 그보다도 조금 더, 그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내 친구의 감정에 대해 듣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구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바로 그 감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다정하고 매력적인지에 대한 아무리 많은 디테일을 듣는다고 해도, 나는 내 친구가 된 것처럼 그의 연애 상대를 좋아하게 되거나 그를 향한 설렘이나 애틋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친구와 그의 연애 상대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친구는 자기 자신으로서 특정한 한 개인을 사랑하고, 연애 상대는 또 그 자신으로서 내 친구라는 한 명뿐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이상 그들이 서로에 대해 가진 것과 같은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 내가 설령 친구의 연애 상대와 연애를 시작한다고 해도, 지금 친구와 그 사이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친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 감정은 현재의 연애 상대와 나누는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그래서 상복을 입고 잔뜩 울어 엉망인 얼굴로 장례식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그를 본다면, 나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또 직장에서 부당 대우를 하는 상사의 얘기를 하며 얼굴이 붉어지도록 화를 낸다면 나도 같이 테이블을 치며 그를 저주하게 될 것이다. 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서로의 눈에서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친구 커플을 목격할 때 내가 그들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당사자들에게 엄격히 귀속된 로맨스적 사랑과는 달리, 슬픔이나 분노는 쉽게 전달된다. 




 

따라서 많은 로맨스 영화들의 경우 관객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멋있게 묘사된 인물을 동경하거나, 아름답게 묘사된 연애를 향한 환상을 충족시키는 경험을 할 뿐 정작 인물들이 느끼는 사랑이라는 바로 그 감정에는 공감할 수 없다. 설령 배우의 아름다움을 주목한 카메라에 이입하여 관객이 정말로 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면 그건 관객과 인물 사이의 사랑이지 영화 내에서 표현되는 주인공 간의 사랑이 아니다. 또 우리는 두 주인공의 사랑이 마침내 이루어졌을 때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행복감은 주인공이 원하던 무언가를 이룬 데서 파생되는 충족감의 감정이지 로맨스 그 자체가 기능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로맨스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전이될 수 없는 이 감정을 묘사하고자 최선을 다 한다. 이때 영화가 자주 선택하는 방법은 사랑을 다른 이해 가능한 감정들로 바꾸어 전달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두 개인 간에 존재하는 로맨스적 사랑은 이해할 수 없어도 다른 보편적인 감정들에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는 영화가 어떤 것이든 감정을 유도하는 방식과 맥을 같이 한다. 영화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맨티스처럼 특정 감정을 느끼도록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지만, 조명으로, 대사로, 프레임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영화의 형식에서 가능한 모든 장치들로 감정들을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그렇게 유발한 감정들을 사랑을 만들어내는 데 이용하기도 한다. 서로를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으로 그들이 함께했을 때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표현하고, 상대가 주인공을 두고 바람을 피웠을 때 느껴지는 배신감으로 상대가 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하는 식이다. 

 

예컨대 <타이타닉>에서 우리가 잭과 로즈의 사랑을 가장 근접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잭이 로즈에게 첫 눈에 반했을 때나 육체적 정사를 나눌 때인가, 아니면 노인이 된 로즈가 잭을 떠올리며 슬퍼할 때인가. 잭이 로즈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때, 우리는 잭이 로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개념을 이해할 뿐 잭이 된 것처럼 로즈에게 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케이트 윈슬렛의 미모에 정말로 사랑을 느꼈다면 그건 가상의 인물을 향한 한 관객의 사랑이지 잭과 로즈 사이의 감정이 아니다. 그러나 잭이 차가운 바다에 몸이 얼어가며 로즈를 판자에 올렸을 때의, 또는 노인이 될 때까지 잭을 잊지 않은 로즈가 느끼는 그 슬픔과 회한은 쉽게 전도되어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한다. 이 장면이 표방하는 감정은 사랑보다는 슬픔일 테지만, 사랑이 아닌 바로 그 감정에서 우리는 로즈가 잭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로맨스 영화가 이런 방식으로 로맨스적 사랑을 전달한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주인공인 샬롯과 밥 사이의 사랑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는 감정은 외로움인데, 그 둘이 타지에서 경험하는 공허감이 둘이 함께할 때 경험하는 외로움의 충족과 대비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많은 로맨틱한 장면 중 엘리오의 첫사랑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장면은 무엇보다도 올리버의 결혼 소식을 듣고 둘의 관계가 그저 한때의 것이었음을 깨달으며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이다. 

 

흥미로운 것은 행복이나 외로움, 슬픔이 아니라 사랑과 아주 멀어보이는 감정도 이렇게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팬텀스레드>의 노란 독버섯을 비추는 초록빛 조명이 유발하는 역겨움과, 사선으로 하관의 일부를 비춰 클로즈업한 레이놀즈의 긴장감, 그리고 위협적인 카메라 각도와 충돌하는 알마의 순진한 표정에서 오는 공포감은 다름 아닌 사랑의 표현을 대행한다. 우리는 레이놀즈가 독버섯을 먹는 것이 곧 알마에게 자신의 병수발을 들게 하는 것임을 알고, 앞선 인물 묘사를 통해 레이놀즈가 자신의 결정권을 순순히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이 장면의 역겨움과 경직과 공포감은 역설적이게도 레이놀즈가 알마에게 느끼는 사랑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다. 내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을 만큼 당신을 사랑해. 단순히 말로 했다면 느껴지지 않을 사랑이 레이놀즈를 구토하게 할 독버섯 오믈렛을 경유하여 전달된다.

 

로맨스 영화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사랑의 증표’들도 비슷한 역할로 설명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인 이미지로 구현하여 이 불가사의한 감정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가 꺼내보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사진과 자신의 셔츠 속에 포개진 잭의 셔츠에는 짙은 후회가 묻어 있다. 잭이 살아있을 땐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잭의 흔적만이라도 끌어안아보려는 셔츠의 배치를 통해 전달된다. 그의 상징적인 마지막 대사만으로는 전해지지 못했을 감정이 이제는 옷장에 갇혀버린 광활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추억과 옷가지를 통해 우리에게 닿는다. 




 

<헤어질 결심>이 로맨스 영화의 이런 속성을 설명하는 데 아주 적합한 이유는 이 영화가 사랑한다는 한 마디 없는 로맨스 영화이기 때문이다. 서래가 들었던 사랑한다는 말을 해준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로맨스적 사랑이 그 자체로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로맨스 영화의 속성을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것 같다. 사실 해준은 정말로 서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 없다. 하지만 서래도, 관객도 해준이 서래를 사랑했다는 걸 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이 아닌 무언가에서 사랑을 포착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가장 ‘로맨스 영화다운’ 장면은 사랑을 전달하는 부분이 아니다. 집에서 주인공이 상대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장면은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낭만적인 장면이다. 이 장면이 해준의 설렘을 표방하긴 하지만, 낭만적이라기보단 해준의 의심과 서래의 불안함이 감도는 불편한 장면에 가깝다. 해준이 서래에게 볶음밥을 만들어주는 동안 서래는 그의 방을 살펴본다. 이때 카메라와 동일시되는 서래의 시선은 가벼운 구경이라기보단 목적을 가지고 구석구석 탐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중에서도 서래가 집중하는 부분은 그의 책상과 사진이 붙은 벽이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해준의 관심과 함께 그가 아직도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증거를 발견한다. 자살로 마무리된 남편의 사건이 아직 해준에겐 미결로 남아있음에 불안한 서래의 정면 클로즈업과 시체의 모든 구멍에 알을 낳는 파리에 대한 말과 이어지는 볶음밥의 계란은 약간의 역겨움과 긴장과 함께, 사랑보다는 불편함을 시사한다. 

 

절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 또한 로맨스를 자아낸다는 장면이라기보단, 의도성이 짙은 서래의 접근과 그에 속절없이 걸려드는 해준의 모습일 뿐이다. 해준은 서래가 자신과 같은 종족임을 알아봤다고 말하지만, 그는 사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서래가 자신의 소지품을 살펴보고 녹음 파일을 지우는 동안 무방비하게 자신을 노출할 뿐만 아니라, 거칠어진 서래의 손과 같은 새로운 증거들도 알아채지 못한다. 함께 녹음 파일을 듣는 장면에서 해준의 눈과 서래를 향한 그의 시선의 교차는 서래가 여러 증거를 차례로 없애는 동안 해준이 얼마나 그에게 눈 멀어 있는지를 나타낸다. 자신을 질타하는 듯 내려다보는 부처상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을 알아챘을 때 터지는 서래의 울음은 그의 사랑보다는 죄책감의 결과이다. ‘데이트’ 장면들이 로맨스 영화에서 마땅히 두 주인공 간의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지점들이라면 이 두 장면들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로맨스적 사랑은 흔히 낭만적으로 생각되는 행동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처음으로 사랑을 전달하는 부분은 로맨스와는 가장 거리가 먼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마법의 단어는 ‘붕괴’다. 완전히 붕괴했다는 말에서 자연스레 유추 가능한 절망과 자기 혐오가 서래에 대한 해준의 사랑을 전달한다. 직접 등반을 해가며 구소산 변사 사건의 범인을 알아냈을 때 해준이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절망이다. 사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냈을 때 형사가 느껴야 할 감정은 성취감과 흥분감, 또는 안도감이지 절망은 아니다. 그러나 정상에 누워 휴대폰에 뜬 138층이라는 숫자를 볼 때, 그리고 피해자가 떨어진 지점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릅뜬 해준에게서 우리는 쉽게 절망을 읽는다. 이 감정의 이유는 해준이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이 알았던 서래는 서래가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든가 양심을 팔아 이 사실을 숨겨야 하는 갈림길에 놓였기 때문이다. 즉, 이 절망은 서래를 사랑했음에서 온다. 배신감을 느꼈다는 것은 곧 믿었다는 것이고, 좌절했다는 건 그와 그리던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또 그가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다며 자신을 탓할 때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에 대한 체념과 함께 짙은 자기 혐오가 서려 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여자에게 해준이 먼저 묻는 것은 어떻게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왜 경찰을 믿지 못했는지다. 이 자기 혐오의 감정은 그토록 경찰과 사법 시스템에 믿음과 자부심을 가진 그가 자신의 붕괴를 선언하고 서래에게 증거 인멸을 지시하는 자신에게서 오므로, 이 감정 또한 그 뿌리가 사랑에 있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서래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를 최연소 경감으로 만들어준 그 신념을 내팽겨칠 정도로 서래를 보호하려 함이 그 죄책감의 원인이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 장면이 사랑의 전달에 있어서 중요한 또다른 이유는 감정이 가장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다른 감정을 통해 전도되다는 점 때문에 어떤 종류인지에 앞서 그 감정의 농도도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서래나 해준은 이상할 만큼 남들을 향한 감정 표현이 억제되어 있다. 서래가 죽은 두 남편들이 아니라 해준을, 해준이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서래를 사랑했던 것이 명백했던 이유는, 둘 다 자신의 배우자에게는 감정 표현이 아주 드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래는 남편이 죽었을 때 거짓으로라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엄마를 죽였다는 얘기를 할 때도 그저 덤덤하다. 호신과 서래 사이에는 감정의 교환이 거의 없는데, 서래가 철성에게 맞았을 때 호신은 걱정하지 않고 서래는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해준 또한 아내와의 잠자리에서조차 다정한 한 마디 없는 남편이다. 산오의 입장에 공감해줄 때가 드물게 그의 감정이 격앙된 장면이었으나 이는 그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었을 뿐이다. 그를 향해 총을 쏘자마자 다시금 그의 건조하게 부라린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산오가 죽은 뒤의 휴게소에서 해준은 다시 아내와 무감정한 대화를 나누는데, 통화를 끊고 싶은 마음에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일어난 그의 모습은 옥상으로 떨어진 산오를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으로 이어져 등치관계를 이룬다. 그의 아내에게 거짓말을 한 것처럼,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속을 썩였던 산오에게도 유효한 감정을 보인 적 없다. 이런 그들이 서로를 향해 울고, 웃고, 화를 낸다. 다양한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자체가 해준과 서래를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점을 뜻한다. 

 

그러나 서래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던 순간, 해준이 사랑에 의해 붕괴됐음을 선언한 그 순간 제한 되어있던 감정이 폭발한다. 서래가 해준을 진정시키고자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해준은 최대한 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부릅뜨고 그들이 함께했던 ‘그들의 일’을 읊는다. 이때 해준의 강렬한 눈빛과 체념한 듯 눈을 꾹 감는 얼굴은 그가 영화에서 표현한 감정의 최대치다. 구소산 등반 후 땀에 젖은 머리와 지친 듯한 움직임은 이 감정 표현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든다. 이때 해준의 모습은 산오의 자살을 말리려던 때의 그와 겹쳐 보인다. 차이점은 이번에는 꾸며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정을 숨기지 못했던 것은 해준 뿐만 아니다. 이 장면 전까지 쉽게 해준을 속여온 서래도 이 순간만큼은 감정 조절에 능숙하지 못하다. 서래는 들떠 있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의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신나 있다고 할 정도다. 서래가 들뜸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 즉 해준의 절망과 죄책감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이유는 그가 무너짐에서 사랑을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찰로서의 양심과 자부심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후회, 자기혐오의 감정이 한데 뭉쳐 서래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서래에게는 첫 살인을 저질러 간호사로서의 윤리를 저버린 것이 곧 엄마를 향한 사랑이며, 해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방법은 마침내 죽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런 서래에게 해준이 경찰로서의 양심과 자부심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후회, 자기혐오의 감정은 곧 사랑 고백으로 들렸다. 해준이 자신 때문에 무너졌음을 인정하는 그 순간을 붙잡고자 몰래 녹음기를 켤 뿐만 아니라 슬쩍 웃음을 흘리기까지 한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이 둘이 도무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통상적인 로맨스와 거리가 먼 이 장면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랑을 전달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채 숨기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우리가 인지하는 절망과 자기혐오에 따르면, 이 순간 해준이 숨기지 못하는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해준의 사랑이 절망에서 온다면, 해준에 대한 서래의 사랑은 절박함에서 온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죽이면서까지 살아남고자 했던 서래는 해준을 만나고 나서는 감옥에 가거나 죽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에게 사기나 치고 다니는 주식 브로커와 결혼한 이유도 바로 해준이다. 철성과 같은 사기 피해자들에게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게끔 맞아가면서도,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그의 엄마를 죽이면서도, 나아가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미결 사건으로 오래 해준의 마음에 남고자 했던 절박함이 바로 서래의 사랑이다. 해준은 서래가 바닷가에 판 구덩이에 들어앉기 직전, 자신의 사랑이 시작된 지점에 대해 언급할 때까지도 서래가 자신을 사랑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서래를 사랑했다는 자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서래가 의도했던 그대로 해준은 서래가 바닷가에서 사라졌을 때, 즉 서래의 절박함이 증명된 바로 그 순간 그의 사랑을 깨달았을 것이다. 만조가 되어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그곳을 미친 듯 누빌 때가 돼서야 자신이 서래를 사랑하며, 서래 또한 자신을 사랑했음을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서래에게 대접한 초밥이나 중국식인지 의심스러운 볶음밥, 한밤 중에도 그가 부르면 달려나오는 모양새와 꼿꼿함을 동경하는 대사가 서래에 대한 해준의 호감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단지 해준이 서래를 좋아한다는 개념만을 전달할 수 있다. 서래도, 우리도 해준이 이렇듯 ‘평범하게’ 호감을 드러낼 때는 이해하지 못하던 감정을 절망과 붕괴, 자기 혐오와 죄책감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해준 또한 그 전까지는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랑을 오직 서래의 절박함을 통해 인식할 수 있었다. 서래와 해준이 서로의 사랑을 느끼는 방식과 우리가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은 로맨스 영화가 사랑을 전달하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을 운반할 다른 감정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랑이 아닌 감정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로맨스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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