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가 없으며, 평소 무작위의 스팸전화나 가족 외엔 전화수신음이 울리지 않는다. 첫째 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전화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일정이었음에도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몸의 끄트머리부터 차갑게 얼고 귀가 먹먹해졌다.
전화기의 좁은 틈으로 들려오는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낮고, 템포가 느리고, 음고가 없이 차분했다. 따라 나도 소리를 낮추어 더욱 찬찬히 속도를 줄여 인사를 건넸다.
"아이를 어찌 이렇게 훌륭하게 길러내셨나요."
한 음을 길게 소리 내듯 일정한 어조로 무심히 시작하는 당신의 문장. 하나 그 내용은 나직하고 새들한 당신의 목소리와 자못 이질적이었다. 발신한 이의 문장이 수신자와 시공간을 달리하는 것으로 느껴져, 나는 당신의 문장을 잡아 의미를 찾는 데 한참이 걸렸다.
첫째 아이가 상담신청 기간에 담임선생님과 약속을 잡았는지 수차례 확인하기에 전화상담을 신청했다.
전교에서 공부의 순위를 다투는 아이가 아니고, 체중이 80kg에 육박하며, 반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아이. 단번에 매력을 찾기가 어려운 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당신은 매 순간 찬찬하게, 양파 껍질을 벗기듯 곱고 매력적인 속이 비칠 때까지 매운 눈을 참으며 바라보고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이마다 시선을 맞추고, 마음이 포개어질 때까지 하릴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려주었을 것이다. 당신의 발화법처럼 유유하고 잔잔하게.
시선을 마주하는 일은 어렵다. 더욱이 상대의 시선, 그 높이에 오롯이 나를 맞추는 일은 험난하게 고단한 일. 무릎을 구부리거나, 까치발로 서거나, 두 다리의 간격을 벌리거나 하여 고민에 수고를 더하여 다정을 만드는 일. 세상의 수많은 것들 중 아이의 마음에 꼭 가졌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었다. 녹녹한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디 당신처럼 사랑으로 충만한 어른이 알려준 다정만은 농농하게 간직하고 살아가길 바랐다.
앞으로의 날들이 더욱 궁금해지는 아이라며, 담임으로 만나 함께할 수 있음에 본인이 더욱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선 통화는 짧게 끝났다.
아이 곁엔 나 혼자가 아니었다. 근사한 어른들과 함께 아이를 키워가고 있었구나. 당신 덕분으로 유약했던 아이의 마음이 단단하게 여물고 있었구나. 나도 당신처럼 아이의 다음날들이나 아이들이 빚을 열매 같은 것들이 문득 궁금해지는 한낮이었다.
이러한 말이 이토록 간곡하게 들렸던 때가 있었나. 사춘기에 들어선 두 아이 곁에서 아슬아슬하기만 했던 내게 그저 간절했던 탓인가. 문장들의 사실 여부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짧은 통화, 그 안에 속절없이 전해받은 꼭꼭 접힌 마음을 그만 그대로 두고 싶었다. 당신이 궁금해졌다.
하교 후, 아이에게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인지 물었다. 쉬지 않고 말을 내는 것이 특기인 아이, 그의 대답은 모처럼 간략했다.
"아주 좋은 분."
명쾌한 답이었다. 좋고 좋은 것들을 모두 모아 피워낸 '좋은'이라는 단어를 다발로 묶어 선생님께 고스란히 선사하고 싶었다.
때로는 나를 모르는 이가 들려주는 말이 거대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당신이 읊어주었던 느릿한 문장 덕분으로 유난스레 용기 내어 빌었다. 다정한 어른이 부리는 마법만이 동하는 세상을. 그리고 어느 즈음, 누군가가 아이에게 나에 대해 물어보면, 같은 답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아주 좋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