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주인공 시점의 세상살이
소설에서는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 있다. 화자는 소설속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마음 속속들이 다 알고 있고, 왜 그런 말을, 행동을 하는지 세세하게 설명한다.
영화속에서는 관찰자로 관객은 주인공이 알지 못하는 배경과 이유를 먼저 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철저하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내가 직접 듣고, 보고, 이해를 한 사실에 대해서만 인지를 하고 이해를 하고 말이나 행동의 동기가 된다.
사람들은 아주 어릴때부터 사회속에서 자신의 역할이나 혹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학습한다. 채 한글을 떼기도 전에 또래집단과 사회를 이루는 연습을 먼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20여년 가까이 학교라는 집단생활을 겪으며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마냥 쉬운것은 아니다. 많은 시간을 거기에 쏟아붓고도 타인의 감정이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워하기도 한다. 직장에 다니면서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문제는 일이 아니라 보통은 사람이었다. 물론 일이 힘들 수도 있지만, 그 일의 힘듬도 대부분 사람을 동반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은 스스로 어떤 공동체에 속할때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만큼 그 공동체에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때, 감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모순적이지만, 인간의 머나먼 조상은 개체 혼자 살아남는 법보다 집단을 이룰때 더 살아남기 용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인지 우리의 본능적 DNA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을 거라 생각된다.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느껴졌다면 사과드립니다"
우리는 이런 식상한 문장의 사과를 꽤 많이 받고, 또 하면서 살아간다. 나는 그럴 의도도, 그럴 마음도 아니었는데 상대방이 과민하게 반응한 것일수도 있고,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 상대방이 불쾌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이런 사과의 이면에는 바로 태도, Attitude의 문제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이기에, 본인이 어떤 객관적인 지위 또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그걸 망각하고 마치 세계의 심판자인양 어떤 문제에 있어 자신의 주관에 대한 객관성을 과하게 자신할 때 상대방에게 불쾌함과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대부분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때, 본인의 주관에 대한 객관성을 과하게 자신하는 경우는 그 문제가 너무 명백해서 일때가 있다. 너무 뻔하게 해결방법이 보이는 문제의 경우 자기 주관에 대해 과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명백하게 보이는 문제가 때로는 아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다른 문제들, 또는 다른 함정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그런 문제를 기꺼이 하는 형편이 아닌 이상, 즉 어떤 지위와 위치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을때는 좀 더 스스로를 1인칭 주인공으로, 상대방도 1인칭 주인공으로 인정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문제는 회사에서 많이 겪을 수 있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전형적인 문제도 많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기 어려운 문제들도 있다. 회사의 프로세스가 애시당초 잘못 설계되어 있거나 관행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거나 하는 문제들은 직원 개별에게 문제를 책임지우기 힘든 문제이다. 그럴수록 관리자나 또는 관리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좀 더 본인의 "자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태도와 자세는 어쩌면 말이나 표정보다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 열쇠이다. 그가 어떤 태도와 자세에 있는지는 대화의 첫마디 또는 대화의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문제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려운 문제를 수정하고 고쳐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에 대해 번거로움과 불편함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보기에는 그냥 단순하게, 수정하고 재시행하거나 되돌리거나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것을 실제로 하는 사람은 다시 반복하거나 또는 얻었던 것을 다시 내놔야 하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어느 회사를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퇴사할 때 겪었던 일이 있다.
사실 같이 일하는 상사는 공정한 평가도, 조직운영에 있어서 유연성도 없던 사람이었다. 본부장의 출퇴근을 체크하면서 직원들의 야근을 강제했고, 자신이 세운 원칙이면 재검토나 재확인 등도 필요없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특히 평가를 함에 있어서, 그런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편견을 기준으로 제시하면서 팀원들을 설득하기는 커녕 반발을 일으켰던 사람이었다. 그 즈음에 다른 회사에서 좋은 제안을 받아 입사 후 경력이 길지 않았음에도 이직을 결심하고 퇴사를 인사팀에 통보했다.
인사팀의 어느 차장님이 면담을 요청해왔다. 뭐 이직한다고 하면 이직자에 대해 면담을 진행하는 것은 대부분의 많은 회사에서 하는 일종의 요식행위라 생각했다. 대부분 그냥 어느 회사 가는지 물어보고 다른 불편함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차장님은 다가오는 방식이 굉장히 신선했다. 나를 뽑았던 과정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해주면서 당신은 그만큼 소중하게 관리되는 직원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나를 대체할 사람을 뽑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더 떠나지 않도록, 그리고 나같은 사람이 더 오래도록 남을 수 있도록 불편함을 이야기 해 달라고 했다.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떠나는 사람에게 어쩌면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대도 넌지시 말해주었다. 나는 일련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보통 그런 이야기는 공염불이라 생각해서 잘 하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그 차장님의 진정성있는 자세를 보고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업무의 연속이고, 요식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려움을 들어주는 소중한 과정이 될 수도 있다. 태도와 자세의 문제는 내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혼자 초능력자가 아님을 인지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모두의 마음속을 읽을 수도 없고, 모두의 행동을 가늠할 수도 없다.
모래사장에서 모래집을 지어놓고 혼자 부수고 혼자 새로 지을 수 있는 놀이는 사회적인 나를 발견해가면서 점점 진부한 놀이가 된다. 나는 어떤 절대자도, 어떤 심판자도, 어떤 영웅일 수도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나의 "자세"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 닿는 나의 표현이다.
갈등은 실제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에서 대부분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