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었다.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고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학교는 졸업했겠다. 순위고사는 합격했겠다. 이제 발령을 받아 학교로 출근할 일만 남았다. 한정된 휴가란 얼마나 달콤한가. 달콤한 휴가를 그냥 흘려보낼 수 없어 친구랑 둘이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배낭은 쌀이며 꽁치통조림 야채들로 가득 차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젊음이란 이름은 그 돌덩이조차 거뜬히 짊어지게 만들었다.
덜컹이는 동해안 7번 국도를 버스로 달려 도착한 곳은 울진 성류굴. 사전 정보가 없었던 만큼 억겁의 종류석들이 빚어낸 난생 처음 보는 전경은 신비롭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서 방향을 틀어 단양으로 향했다. 단양팔경이란 말에 혹해서.
교통편도 제대로 없는 그 오지에서 그래도 갈 곳은 다 가고 구경할 건 다 하고 다녔다. 인적도 없는 시골길에 어쩌다 지나는 트럭은 손만 들면 어김없이 멈추고 태워주었다. 묘령의 아가씨 둘이 배낭을 메고 트럭을 얻어 타도 아무도 농담을 건네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기꺼이 태워주고 또 차를 스스럼없이 얻어 타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시절. 참 좋은 세월이었다.
아름다운 도담산봉을 눈에 깊이 간직하고 수안보 온천을 거쳐 문경새재에서 마지막 쌀과 카레를 털어 하나 남은 사과를 넣은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먹는 걸로 우리는 여행을 마무리했다.
어이~ 아가씨들!
멀리서 남자들이 소리쳤다. 삑삑 휘파람을 불어대면서.
<여기서부터 경상북도입니다> 팻말이 보이자마자 나타난 현상이었다. 공짜 트럭을 태워 줘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그곳은 충청도였구나. 충청도 사람들은 양반이라더니 이렇게 다르구나. 머리에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여행 후유증으로 자리에 누운 내게 발령장이 날아들었다. 경상북도 의성군 **중학교. 도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일단 어디쯤인지 미리 한번 가봐야겠지. 숙소도 알아보고.
마침 인근 군부대에서 근무하시던 이모부가 지프차를 내주셨다. 벽도 없이 사방이 뻥 뚫린 국방색의 지프차는, 나를 싣고 꼬불꼬불 연분홍 벚꽃이 피어있는 비포장도로를 뽀얀 먼지를 날리며 달려갔다.
너무도 나른한 봄날이었다. 햇살이 쏟아지고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마구 아롱거렸다. 연분홍꽃과 아지랑이가 어우러지는 길은 끝없이 이어져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다시는 되돌아 나올 수 없는 어떤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달착지근한 봄바람에 스르르 내려 덮이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하고 꿈일까 현실일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차는 학교 근처에 도달했다.
여기서 세워줘요!!
교문 앞에서 앙칼지게 소리쳤지만 운전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전 속력으로 교문을 통과해 멋지게 원을 그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단상 앞에 차를 세웠다.
이 무슨 발칙한 짓이란 말인가. 운동장 안에 차를 몰고 들어오다니. 내 상식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운전병은 나를 위해 최대의 서비스를 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수업 중이던 학생들이 일제히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조용하던 시골 학교에 느닷없이 군부대 지프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운동장으로 뛰어들었으니 모두 놀랄 만도 했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교무실까지 전교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걸어가는 길은 참으로 난감 그 자체였다. 남자애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다시는 돌아 나갈 수 없을 것만 같던 아지랑이 아롱거리던 그 봄날의 끝에는 죄송하단 말부터 해야 했던 내 교직생활의 시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날이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