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은 유대인인 질이 살아남기 위해 페르시아인으로 행세하며 나치 대위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친다는 내용이다. 질은 페르시아인이 아니므로 당연히 페르시아어를 모른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그는 단어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단어들은 모두 수용소에 끌려온 유대인 수감자들의 이름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나치 대위인 코흐는 매일 밤 질이 알려준 페르시아어를 공부할 때마다 실은 수용소에 갇혀서 노역 중이거나 혹은 살해당한 유대인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었던 셈이다.
코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려고 했던 이유는 전쟁이 끝난 뒤 테헤란에 가서 식당을 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군인이 되기 전에 요리사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하필 테헤란일까. 코흐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코흐의 동생은 코흐가 나치가 된 후 말도 섞지 않았고 테헤란으로 가게 된 경위도 일반적인 이주가 아닌 도피라는 점에서 반나치 세력으로 짐작된다. 패전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코흐의 입장에서 승자의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유럽 대신 아무런 기반도 없는 중동으로 가는 이유는 동생과 화해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그가 나치가 된 것이 동생과는 다르게 스스로의 정치적 신념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 나치가 되었느냐는 질의 질문에 코흐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갈색 셔츠를 입은 당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실컷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길로 가입했다고. 이 말은 코흐가 나치의 정치적 기조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찾은 게 아니라 마치 대중문화의 어떤 요소를 선택하듯 즉흥적으로 나치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청바지를 입은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청바지를 사서 입은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청바지를 사서 입는 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지만 나치가 되는 것은 전범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남들이 하길래 나도 한 번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흐는 왜 나치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코흐가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매일 같이 유대인이 잡혀와 학살당하는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치 그가 배우고 있는 페르시아어와 같다. 발음은 하고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코흐는 모른다.
코흐는 그의 말처럼 친절한 사람이다. 질이 강제노역 대신 수감자 명단을 작성하는 사무업무를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유대인 막사에 음식을 반출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질을 살리기 위해 이상한 소문이 나서 평판이 깎이는 것도 감수했고 질이 농장 대신 죽음을 선택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그를 구하러 오기도 했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는 관리자와 수감인이라는 상하관계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친구처럼 되어간다. 독일이 패망하고 총퇴각 명령이 내려지자 수용소에 있는 유대인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도 혼자 도망치지 않고 질을 데리고 나온 것도 코흐였다. 어쩌면 관객들 중에는 가짜 페르시아어로 말하다 연합군에 체포되는 코흐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확실히 코흐는 평범하고 다정한 사람일 뿐이며 그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쟁의 희생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흐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명한 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질을 죽이려는 막스 병장이나 분풀이로 유대인 여자의 손을 뜨겁게 달아오른 불판 위에 지지는 엘자는 나치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유대인의 피를 손에 묻히는 막스가 수줍은 연인처럼 엘자에게 선물을 건낼 때 그리고 자기 업무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유대인 하나 죽이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엘자가 연인을 위해 단장하고 나설 때 우리는 그들의 위선과 기만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위선과 기만이 아니다. 유대인에 대한 가학이라는 점만 빼놓고 보면 막스와 엘자는 그 시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유럽의 젊은이들이다. 착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자기 연인을 아끼고 사랑할 줄은 안다. 그러나 이 흔한 유럽의 젊은이가 위선과 기만으로 얼룩진 악으로 표상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유대인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코흐에게도 할 수 있다. 코흐가 직접 유대인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가 실무자가 아닌 관리직이기 때문이다.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확신했을 때 그는 질을 무참히 구타한 뒤 피묻은 손으로 장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직접 묻힐 기회가 없었을 뿐 그가 유대인의 피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질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그가 자신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준 페르시아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에 대한 가학과 집단 학살은 막스 병장과 마찬가지로 코흐에게도 평범한 삶의 풍경이다.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어떻게 그것을 평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질과 코흐의 페르시아어 수업에서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질이 코흐에게 가르치는 페르시아어는 모두 유대인 수감자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코흐에게 페르시아어로 들린다. 즉 질이 가르치는 말들은 원래 의미가 탈각되고 전혀 다른 의미로 코흐에게 인식된다. 유대인의 죽음이 꼭 이와 같다. 유대인의 죽음에서 살인이라는 의미를 탈각해 버리면 거기에 원래 있어야 할 의미는 다른 것으로 대체된다. 유대인의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바뀌듯이 유대인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아닌 전혀 다른 무엇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기를 잡으면서 살생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고 해충을 퇴치했다고 생각한다. 나치도 아마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아리안 족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라고 생각하면 유대인을 죽이는 일은 살인이 아니라 퇴치가 된다. 죄의식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모기를 잡고 죄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코흐가 페르시아어라고 생각했던 말들은 비행장에서 연합군에 의해 다시 유대인의 이름이라는 원래 의미를 회복한다. 이처럼 의미는 일시적으로 탈각될 수 있어도 그것이 정당한 것이라면 다시 복권된다. 같은 맥락에서 코흐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것, 다시 말해 무의미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죽음은 일시적으로 의미가 탈각되었을 뿐 살인이라는 의미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연합군에게 체포되는 코흐의 최후가 정당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유행을 따르듯 나치에 입당했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으나 그것은 순진했다거나 무지했다는 말로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행에 따른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그 유행을 이끌어가는 무리 속에 위탁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요컨대 코흐는 나치에 입당하는 순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 즉 인간의 권리를 나치에게 맡겨버렸다. 그에게는 분명 친절하고 선한 면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특정 집단에 양도했다면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 집단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다. 막스의 손에 피가 묻었다고 해서 코흐의 손에 피가 묻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권리를 타인에게 혹은 다른 집단에 위탁할 때가 있다. 그것은 친구들일 수도 있고 학과일 수도 있으며 직장일 수도 있다. 권리를 위탁한 집단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집단 내의 소속감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탈각시키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나치당원들은 모두 괴물이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코흐나 막스처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제노사이드를 악으로 인지하지 못한 것은 나치라는 열차가 브레이크가 파손된 채로 달리고 있었고 모두들 그 기차 안에 탄 상태에서는 바깥의 풍경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기차를 운전하지 않았다고 해도 기차가 충돌하면 다치는 건 마찬가지다. 패전은 말하자면 기차의 충돌이었고 나치는 일부는 죽은 채로 다수는 중상과 경상을 입은 채로 기차에서 내렸다. 일견 그들이 피해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기차에 탔다. 이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고 브레이크가 파손된지 몰랐다고 뒤늦게 말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들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죄를 저질렀다. 바로 자아를 타인에게 맡긴 죄. 자아가 없는 인간은 의미를 분간하지 못한다. 의미없는 글자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기가 까막눈을 벗어나고 있다고 믿었던 코흐의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전형적인 그 당시 나치의 모습일 것이다.
2024년 10월 19일부터 2024년 10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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